“내가 외출할 때는 언제나 아내에게 베르가모식 자물쇠를 채운다. 그렇지 않으면 불타는 듯한 붉은 눈의 악마에게 이 몸을 주어버리는 편이 차라리 낫다.” 16세기 프랑스 작가 라블레의 풍자소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 나오는 내용이다.
베르가모식 자물쇠란 정조대(貞操帶·chastity belt)를 뜻한다. 주로 북이탈리아 베르가모 지방에서 생산돼 붙여진 이름이다. 정조대는 ‘비너스대(帶)’, ‘베네치아대’, ‘피렌체대’ 등으로도 불렸다.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은 그가 이탈리아 유학시절 베르가모를 여행할 때 박물관에서 본 철제 정조대의 인상이 워낙 강렬해 곡과 무관하게 제목을 붙였다는 일화가 있다.
정조대의 유래에 대해선 설이 분분하다. 널리 알려진 속설이 중세 십자군전쟁이 한창일 때 장기간 출정 나가는 기사들이 아내의 부정을 막고 성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정조대를 채웠다는 것이다. 십자군이 사라센의 하렘에서 탈취한 것을 토대로 만든 것이란 설명도 곁들여진다.
그러나 중세 기원설을 뒷받침할 근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가장 오래된 정조대 그림은 15세기에야 등장했고, 14세기 음담패설을 모아놓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는 정조대 언급이 전혀 없다. 유럽의 박물관에 전시된 십자군시대 정조대는 실은 19세기 영국산 모조품으로 밝혀졌다.
독일 역사가 에두아르드 푹스는 르네상스기 발명품이라고 주장했다(‘풍속의 역사’). 장기간 항해를 나가는 베네치아 피렌체 등지의 상인들이 주로 썼다고 한다. 당시 정조대는 상당한 고가품이었고 보석 장식도 들어가 아무나 쓸 물건이 아니었다.
정조대가 여성용만 있는 게 아니다. 영국에서 만든 남성 정조대는 자위행위를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설에는 원정을 떠나는 주인이 남자 하인에게 채웠다고도 한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전족은 있어도 정조대와 같은 성적 억압도구는 없었다.
정조대는 발상 자체가 야만적인 풍습이다. 장기간 착용하면 피부병, 욕창 등을 피하기 어렵다. 게다가 정조대를 채운다고 정조가 지켜지는 것도 아니었다. 여성이 은밀히 정조대 열쇠를 정부(情夫)에게 건네는 16세기 풍속화가 이를 입증한다. 덕분에 베르가모의 대장장이들이 열쇠 만드는 부업으로 재미를 봤다고 한다.
최근 성폭행 사건이 잦은 인도에서 성범죄 방지재킷이 등장했다. 착용자가 재킷의 버튼을 누르면 전기충격장치가 작동돼 치한을 기절시킨다. 압력센서가 달려 강제로 만지면 고압전류가 흐르는 특수 브래지어도 개발됐다니 현대판 정조대라고 할 만하다. 남성의 마초적 본능이 빚어낸 희극이자 비극이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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