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민아 / 사진 오재철] 작은 일 하나에도 긴장되고 스릴 넘치던 여행 초반의 새롭고 낯선 경험들도 몇 번씩 반복하다 보니 슬슬 식상해진다. 처음 국경을 넘을 땐 혹시 무슨 문제가 생겨 출국 또는 입국 거부를 당하면 어쩌나 심사대 앞에서 괜한 긴장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여러 번 하다 보니 이름, 생년월일, 여권번호 등 똑같은 형식의 출입국 카드를 쓰는 게 귀찮기만 할 뿐 별다른 감흥도, 긴장감도 사라진 지 오래다.
쿠바로 향하는 비행기 안, 의례적인 입국 카드를 쓰기 위해 주머니에서 볼펜을 찾았으나 없었다. 마침 건너편 좌석에 잘생긴 청년이 앉아 있길래 “Can I borrow your pen?”하고 물어보니 “Sure(물론)”하며 흔쾌히 펜을 빌려준다. “오빠, 오빠! 내 발음이 좀 좋아졌나봐. 외국인이 아주 잘 알아듣는데?” 우쭐해 하니 옆에 있던 잘 생긴 청년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한국 사람이세요?”
나디아와 테츠가 함께하는 ‘나테한 세계여행’은 충분히 즐겁지만 한편으론 365일, 24시간 늘 붙어지내는 우리이기에 새로운 친구가 필요했다. 마침 새로운 활력소가 필요할 즈음 쿠바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26세의 상큼한 비타민 같은 동생이자 친구, ‘민식’이를 만났다. 민식이는 혼자서 미국 서부 렌트카 여행을 마치고 쿠바로 건너오는 길이라 했다. 쿠바에 머무는 기간도 비슷하고, 확정된 일정도 없었기에 함께 여행하기로 입을 맞추고 비행기에서 내려 수하물을 찾기 위해 기다리는데…
오빠와 내 짐을 찾고 한참이 지나 같은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짐을 찾아간 후에도 민식의 짐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에이, 설마…”하며 사무실로 찾아가 물어보니, 실수로 짐을 싣지 않은 것 같다며 칸쿤에서 내일 출발하는 비행기가 오후에 쿠바(하바나)에 도착하면 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16시간 거리에 있는 산티아고 데 쿠바로 곧장 이동하기로 한 일정을 미루고, 쿠바의 수도인 하바나부터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민식이의 짐은 결국 출국하는 날까지 찾지 못했다.)
단순 호기심으로든 가슴 깊이 품은 동경으로든 많은 이들이 살면서 한 번쯤 꿈꿔보는 여행지, 머무는 동안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나라 쿠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우리들의 쿠바 여행에 관한 솔직하고 실질적인 이야기.
비행기에 들고 탔던 작은 배낭만 남은 채 빈털터리가 된 민식이와 함께 터덜터덜 공항을 나섰을 땐 이미 쿠바의 붉은 국기 너머로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오늘 밤은 어디서 자야 하나 한숨을 쉬며 걱정하고 있으니 택시기사 아저씨가 자기가 아는 ‘파르티쿨라르’가 있다며 안내해 주었다.
“네” 일단 대답은 했지만 우리끼리 왈, “파르티쿨라르가 뭐야???”, “파르티쿨라르가 뭐야???” 의문은 곧 풀렸다. 공산주의 국가인 쿠바에서는 개인 소유로 호스텔을 운영할 수 없기 때문에 정부의 허가를 받은 가정집의 방 한 칸을 손님방으로 내어주는 방식으로 여행자들의 숙소를 해결하는데, 이를 ‘파르티쿨라르’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소개받은 파르티쿨라르는 올드 하바나가 한 눈에 보이는 아파트 8층에 위치한 파피네 집. 아버지 연세쯤 된 파피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젊은 시절엔 선원으로 일하며 동해안에도 가봤다 했다. 연노란색 벽지로 칠해진 파피네 방에서는 마치 여행을 마치고 내 방으로 돌아온 것처럼 편안하고 익숙한 집 냄새가 났다. 쿠바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통째로 잃어버려 몸도 마음도 지친 민식이에게 그리고 오랜 여행으로 지친 우리에게 파피네 집은 “괜찮다, 괜찮다, 괜찮을 거다”라며 위로해 주었다.
다음 날 아침, 잃어버린 짐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본격적으로 쿠바의 정취를 느껴보러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쿠바의 명물인 올드카.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색색의 캐딜락들이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올드 하바나의 낡은 건물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모습은 이 곳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진풍경을 만들어 냈다.
거기다 머리는 작고, 팔, 다리는 길쭉하게 쭉 뻗은 쿠바 사람들은 마치 모델이 런웨이를 걷는 마냥 폼나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 직접 보지 않으면 상상만으로는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완벽한 쿠바의 모습이었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운치있는 쿠바의 거리 풍경에 한참 도취되어 있을 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쿠바에 온 지는 얼마나 됐니?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이라고 들어봤지? 오늘 저기 옆에서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공연이 있는데 혹시 관심있니?”, “오? 정말? 당연히 관심있지”, “여기서 얼마 멀지 않아, 내가 데려다줄게”, “응, 좋아!”
지난 밤, 안좋은 일 뒤 만난 파피의 친절함처럼 쿠바 사람들은 참 친절하구나 생각하면서 음악을 좋아하는 민식이와 나는 그를 따라 어느 바로 들어갔다. “여기가 공연하는 곳이라고?”, “응, 조금 이따 바로 시작하니 데낄라나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으면 돼. 여기 데낄라 한 잔!”을 외치는 그. 바로 그 때 민식이와 나의 뒤를 따라 오던 테츠가 우리의 목덜미를 잡고 바를 빠져나왔다.
후에 알게된 일이지만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을 미끼로 우리가 당할 뻔한 것과 같은 사기가 쿠바의 단골 사기 방식이었던 것이다. 1분만 더 있었더라도 데낄라가 나왔을 것이고, 음료수 가격의 몇 배나 되는 가격을 내라고 강요하는 게 그 수법이다. 절묘한 타이밍에 테츠오빠의 구원으로 우린 사기에 걸려들지 않았지만 쿠바에 머무는 동안 “너희 쿠바에 온 지 얼마나 됐니?”로 시작하는 사기꾼들의 꼬임은 끊이지 않고 우릴 귀찮게 했다. 여기서 사기꾼들을 내쫓는 방법! “우리 여기 온 지 일주일도 넘었어”라고 대답하면 "아, 얘네는 한 번은 속았겠으려니"하고 군말없이 물러난다.
하바나를 떠나기 전 날 밤, 민식, 나디아, 테츠는 일몰을 보기 위해 모로 요새 근처 말레꼰으로 나섰다. 8km에 걸친 긴 방파제를 따라 쿠바 시민과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여유로운 저녁을 즐기고 있었고, 우리도 사람들 틈에 끼어 붉은 하바나의 노을을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바나의 드넓은 앞바다(지중해)를 바라보며 말레꼰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덧 두 시간 째 달밤에 산책을… 둘이 아닌 셋이서 오래간만에 왁자지껄 수다를 떨며 걷다보니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하염없이 걸었나보다. 둘이었다면 위험해서 못했을 밤나들이도 든든한 남자 둘과 함께하니 전혀 두렵지가 않았다.
다음 날도 결국 민식의 짐은 찾지 못했다. 공항에선 잃어버린 짐 때문에 울었다가 따뜻하게 맞이해 준 파피 덕분에 웃었다가 사기꾼 때문에 울 뻔하고… 사람 마음을 들었다놨다 요리조리 갖고 노는 쿠바. 낯선 여행지를 대하는 방식에 웬만큼 노련해졌다고 생각한 우리였지만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쿠바의 환영(?) 방식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이럴 때 둘만 있었다면 짜증지수가 늘어 서로 다투었을테지만 짐을 잃어버리고도 허허 웃고 있는 민식이 덕분에 웃으며 쿠바를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하바나에서 버스를 타고 16시간 떨어진 산티아고 데 쿠바로 간다.
산티아고 데 쿠바에선 과연 어떤 일이 생길까? 워낙 예측이 어려운 쿠바 여행이라 하루하루가 기대된다. 사실은 또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함께.
[나테한 세계여행]은 ‘나디아(정민아)’와 ‘테츠(오재철)’가 함께 떠나는 느리고 여유로운 세계여행 이야기입니다. (협찬 / 오라클피부과, 대광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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