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떠난 형 유골 찾기 위해 DNA 시료 제공한 동생 허혹 씨
1951년 가을 어느 날, 부산으로 피난 온 열아홉 살의 허창행 씨는 지게에 땔감을 지고 온 뒤 소집영장이 나왔다는 면서기의 말을 듣고 그 길로 집을 나선다. 그렇게 6·25전쟁에 참전한 허창행 씨는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지게 내려놓고 그걸로 끝이지”라고 말하며 허창행 씨의 동생 허혹 씨(77·사진)는 아무 말 없이 하늘을 쳐다봤다. 허혹 씨는 “6·25만 되면 돌아오지 못한 둘째 형이 특히 더 떠오른다”며 “죽기 전에 형의 유골을 수습하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63년이 지났지만 허혹 씨 가족에겐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다.
허혹 씨는 “둘째 형이 징집되고 나서 어머니는 전사 통지를 받기 전까지 매일 밤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했다”며 “인편으로 형을 장단·사천강 지구 전투에서 봤다는 소식을 접한 뒤 휴전을 며칠 남기고 전사했다고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아버지께서는 1991년 돌아가실 때 ‘올해가 둘째 환갑이 되는 해니 잔치라도 열어주라’고 유언을 남기셨다”며 “지금도 형의 얼굴이 생생히 떠오른다”고 말했다.
허혹 씨는 매년 현충일이 되면 국립서울현충원에 가 마음을 달랜다. 올해도 현충원을 찾은 허혹 씨는 이번에 미수습 6·25 전사자의 유가족을 찾기 위한 시료 채취 행사에 참여했다.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은 2008년부터 이미 발굴했거나 향후 발굴할 국군 전사자 유해의 신원 확인 등 감식 작업에 필요한 유전자(DNA) 시료를 유족들로부터 채취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올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서도 행사를 열었다.
시료 채취에 참여한 유족은 5월 말 현재 2만4915명이다. 앞으로 찾아야 할 전사자가 13만여명에 이르는 것에 비하면 갈 길이 멀다. 6·25전쟁 50주년인 2000년부터 시작된 유해발굴 사업으로 지금까지 수습된 국군 전사자 7303명 중 유전자 감식을 통해 신원이 확인돼 유족 품으로 돌아간 사례는 82건에 그치고 있다.
박신한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장은 “힘들게 전사자 유해를 발굴해 유전자 검사를 해도 일치하는 샘플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영웅들을 편히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더 많은 유전자 시료 확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성택 기자 naiv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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