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 400만명 무임승차하는 등 보험료 부담의 형평성 문제 심각
국세청 소득자료 상호공유 절실
윤희숙 <KDI 연구위원·보건복지>
한국의 사회정책을 소개할 때 거의 예외 없이 외국인들을 놀라게 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의료보험이 처음 도입된 후 불과 12년 만에 전 국민을 포괄하게 됐다는 점이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1883년 세계 최초로 공적의료보험을 도입한 독일도 전 국민을 포괄한 것은 2007년에 이르러서이다. 미국은 오바마 개혁으로 ‘100년의 꿈’에 다가설 것이라 기대하지만 개혁 후에도 여전히 2000여만명이 보험을 갖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전 국민 보험과는 거리가 멀다.
급속한 산업화 속에서 의료보장의 필요가 컸고 최고 권력자의 관심이 높았다는 점 등 여러 원인을 꼽을 수 있지만, 어찌 됐건 한국의 건강보험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할 것 없이 전 세계에 거리낌없이 내놓을 수 있는 자랑거리이다. 그런데 막상 졸던 사람까지 의자를 당겨 앉으며 질문공세를 펼치기 시작하면, 곤혹스러운 순간들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피하고 싶은 대표적 문제는 보험료 부담의 불형평성이다. 보험 혜택만 전 국민을 포괄할 뿐, 보험료는 소득이 있는 국민 중 일부만 부담할 뿐만 아니라 ‘경제력에 따른 부담’이라는 원칙도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가입자로 보험료를 납부하는 이가 1300여만명에 불과한데, 최저임금 이상 근로소득자 중 피부양자로 전혀 보험료를 부담하지 않거나 지역가입자로 등록한 이가 400여만명에 이른다. 또한 지역가입세대의 56%인 443만세대는 소득 자료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런 허점을 이용해 별 부담 없이 건강보험 혜택을 받는 이들은 다른 사회보험 가입을 기피한다. 예를 들어, 고용보험에 가입하면 근로소득이 있다는 것이 사회보험공단에 파악돼 그간 피해오던 건강보험료까지 새로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는 건강보험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보험 전체의 사각지대 문제이기도 하다.
만약 이 문제가 국내 경제 내 전근대적 부문이 광범위해 소득 파악 정도가 낮기 때문이라면 단기간에 개선하기 어려운, 불가피한 난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경제는 지역가입세대의 절반 이상이 소득 자료가 없을 정도의 후진성은 오래전에 넘어섰다. 빠져나간 근로소득자 대부분의 소득 자료는 국세청이 확보하고 있다. 건강보험공단이 이를 활용하지 못할 뿐이다.
현재 일정소득 이하 일용직 근로자에 대해 건강보험공단 등 사회보험 공단은 국세청으로부터 소득 자료를 제공받지 못한다. 이 구조에서는 사용자와 근로자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근로자가 그렇게 분류될 수 있도록 흔히 소득을 낮춰 보고한다. 그러니 상당수의 피부양자와 지역가입자는 장부처리를 통해 사회보험 행정으로부터 숨어버렸거나, 굳이 위장하지 않더라도 제도의 허점 때문에 사회보험에 드러나지 않은 근로소득자가 된다. 더구나 이들 중 70% 이상은 소득 5분위 이상 가구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결국 문제의 원인은 정부기관의 칸막이 행정이다. 국세청이 이미 존재하는 한, 사회보험 공단이 국세청 수준의 조사 인프라를 별도로 갖추는 것은 비효율적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보험 운영을 위해 필요한 자료를 국세청이 제공해야 사회안전망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 건강보험공단의 자료협조 요청에 대해 국세청은 사회보험료 부담을 회피하려는 사업자들이 소득자료 제출을 기피해 국세청 업무를 어렵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거절해왔다. 국가 전체보다는 자기부처의 업무만 신경 쓰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건강보험 때문에 사각지대가 축소되질 않으니 고용보험이나 연금보험 미가입 근로자의 건강보험료도 세금으로 지원하자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건강보험 혜택이 이미 전 국민에게 제공되고 있는데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재정투입이라니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칸막이를 초월해 조율할 리더십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면, 우스운 일은 필요한 일이 되고 만다.
윤희숙 <KDI 연구위원·보건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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