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환자 쫓아내고…임시거처를 입원실로 써…서무직원이 진료하기도
예산 아끼려 의사 줄여…시설 투자도 엄두 못내…개혁안 수십년째 '퇴짜'
“2005~2012년 21개 병원에서 1만3000여명의 환자가 피할 수 있었던 죽음을 맞이했다.”
영국 정부가 16일(현지시간) 공개한 국영의료시스템(NHS·National Health Service) 실태조사 보고서가 영국 전역을 충격에 빠트렸다. ‘일반적인’ 치료만 받았어도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던 1만3000명의 환자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번 조사는 지난 2월 영국 중부 스태퍼드셔병원에서 1200명의 환자가 치료 부족으로 사망했다는 내용이 공개된 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직접 지시해 이뤄졌다.
○충격적 참상
보고서의 내용은 충격적이다. 셔우드포레스트병원에서는 오전 3시에 고령의 환자를 “더 이상 해 줄 게 없다”며 쫓아냈다. 1600명의 환자가 부족한 치료로 목숨을 잃은 바실돈앤드투록대학병원에선 환자들이 샤워 시설도 없는 임시 거처에 2주간이나 입원해 있었다. 어떤 환자는 이동식 침상이 없다는 이유로 구급차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북부린콜셔앤드굴병원에선 의사가 너무 부족해 서무직원이 병원을 찾아온 환자의 응급 여부를 판단하기도 했다. 한 병원에선 의사가 부족한 나머지 간호사가 999(한국의 119)에 전화해 도움을 청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이 같은 부실 진료의 근본 원인은 NHS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영국은 1948년 NHS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모든 병원을 국유화했다. 1980년대 말 ‘오일쇼크’로 경제가 크게 흔들리기 전까지 국가가 모든 병원을 직접 운영했다. 처음 이 시스템을 개혁하려 한 사람은 마거릿 대처 전 총리다. 그는 1990년대 초 2차 의료기관 개념인 ‘NHS트러스트’가 일정 부분 자율권을 갖고 경영해 이익을 남길 수 있게 했다.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국가예산으로 운영한다는 기본 방침은 바꾸지 못했다.
결국 병원들은 의료 서비스의 질을 높여 환자를 더 유치하기보다는 국가가 준 예산을 최대한 아껴쓰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시설 투자는 이뤄지지 않았고, 의사 수도 점점 줄었다. 결국 수만명의 환자가 죽음으로 내몰리는 결과를 낳았다.
○손댈 수 없는 NHS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월 스태퍼드셔병원 사건을 비롯해 그 전에도 NHS의 부실 진료에 대한 불만이 이어졌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여전히 압도적으로 NHS를 지지한다. 영국 국립사회조사센터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NHS에 대한 만족도는 64%다. 부실 의료 사건이 터지면 NHS 자체에 대한 개혁보다는 “정부가 예산을 더 써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영국 하원 조사에 따르면 2011년 의료비 지출은 2000년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 1970년대 이후 영국 정부의 의료비 지출은 한 해도 감소한 적이 없다.
사태는 정치공방으로 번졌다. 제러미 헌트 보건부 장관은 이번 결과에 대해 “전임 노동당 정부가 NHS의 문제점을 덮어왔다”며 대대적인 개혁을 예고했다. 반면 야당인 노동당은 “보수당 정권이 필요한 만큼 예산을 쓰지 않은 탓”이라고 맞받아쳤다.
영국 정부가 NHS를 개혁하기는 쉽지 않다. NHS 및 관련 기관에 소속된 노동자만 200만명이 넘기 때문이다. NHS 노조 중 최대 파벌인 ‘유니손’의 정치적 영향력은 엄청난 것으로 알려졌다. 보수당을 이끄는 캐머런 총리조차 2010년 선거 운동 때 재정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 지출의 20%를 삭감하겠다고 했지만 NHS는 손대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오히려 뇌성마비를 앓다가 2009년 사망한 아들을 언급하며 “온 국민이 무상의료를 받을 수 있게 하겠다”는 선거공약을 내세웠다.
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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