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기 악화 이전 선제대응 절실
이인실 <서강대 교수·경제학 insill723@sogang.ac.kr>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태극전사를 이끌 축구 대표팀 사령탑을 홍명보 감독이 맡게 됐다. ‘독이 든 성배(聖杯)’를 마시는 자리라는 스포츠 전문가의 해석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홍 감독이 취임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 인상 깊다. 그는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팀 중 우리보다 수준 낮은 팀은 없다”고 했다.
그런 그가 한국 축구의 새로운 비전으로 제시한 것은 ‘한국형 콤팩트 축구’다. 정교한 패스로 점유율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스페인 축구나 선이 굵고 압박이 강한 독일 축구가 세계 축구를 주름잡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적절한 공수 균형으로 상대편의 공격력을 둔화시켜 경기를 장악하겠다는 홍 감독의 접근 방식에 대체로 신뢰를 보내는 분위기다.
한국의 금융도 축구처럼 신뢰를 얻지 못하고 ‘실물경제의 시녀’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꾸준히 살길을 모색해 왔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금융정책의 교과서는 미국식 금융이었고, 롤 모델은 글로벌 투자은행이었다. 돌이켜보면 노무현 정부가 금융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키우겠다며 동북아 금융허브 전략, 글로벌 투자은행 육성 등을 야심차게 추진한 것은 당시로서는 그럴 만했다. 산업은행 민영화, 자본시장통합법 제정, 금융 중심지 선정 등이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정책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수시로 터지는 미시적인 금융위기 사건들에 매몰돼 금융산업 발전이란 이슈는 간 곳이 없다.
한국처럼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는 세계화의 진전에서 단물도 받아먹지만 글로벌 유동성 및 국제자본 이동의 변동성 확대라는 독배를 피하기 어렵다. 기초경제 여건이 건실하다고 해도 더 많은 자본이 유입되면 더 대규모의 자본유출 가능성이 생긴다. 지금처럼 미국 등 선진국 통화정책이 양적완화에서 긴축으로 선회하는 때가 가장 위험하다. 굳이 1930년대 대공황을 언급하지 않아도 1970년대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으로 미국 중앙은행(Fed)이 긴축정책으로 통화정책을 전환하자 미국 금융자본에 의존했던 남미 국가들이 외채위기를 맞았다. 1997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금융위기도 통화긴축 정책의 여파로 미국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 국가들이 환율전쟁을 견디지 못한 탓이다.
이제 중규모 개방경제로 성장한 한국은 숙명적으로 외환위기 가능성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넘치는 달러’를 밖으로 퍼내는 정책에 여념이 없었던 때가 있었던가 싶게 지난달 벤 버냉키 Fed 의장이 양적완화 정책의 출구전략 가능성을 비치자 자본유출을 막는 통화방어 정책을 써야 할 상황으로 바뀌었다. 이미 경쟁국가로 부상하고 있는 브라질은 외화자금 유입에 따른 통화절상을 차단하기 위해 채권투자자금 등에 부과하던 토빈세를 폐지한 데다 기준금리도 인상했다. 인도네시아도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외국인 자금유출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작금의 상황이 한국의 경기 하강국면과 맞물려 경기침체를 확대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신흥국처럼 이탈하는 외국인 자금을 붙잡기 위해 금리를 올려야 하는 상황에 몰릴 가능성도 있다. 지난주 한국은행이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종전의 2.6%에서 0.2%포인트 올린 2.8%로 상향 조정하고, 내년에는 4.0%를 나타낼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에 선뜻 동의가 안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정부 역시 경기침체를 막기 위한 선제적 정책이 절실한데, 약발이 끝난 부동산 정책만 만지작거리고 과도한 경제민주화 정책이나 세금감면 축소로 경제의 발목만 잡고 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최근 들어 국제금융시장이라는 정글에서 일어나는 위기 원인은 더 다양해졌고 빈도도 늘고 있다. 국제금융시장에서 상대적 약자인 한국 금융은 우리보다 강한 팀을 상대로 한발짝 더 뛰는 투혼을 발휘해 강력한 압박과 튼실한 공수 조직력의 콤팩트형 전략이 필요하다. 개인 기술이 밀리면 조직력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방법밖에 없다는 얘기다. 선진국 문턱에 있는 한국이 살아남기 위해선 그나마 4강에 올라본 축구 경기 운영에서 한 수 배워야 한다.
이인실 <서강대 교수·경제학 insill723@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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