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보다 두 살 많았던 소헌왕후가 1446년 승하하자 지금의 서울 강남 대모산에 장사지낸 뒤 이를 영릉이라 불렀다. 하지만 영릉이 흉지라는 말이 나오자 세종은 “다른 곳에서 복지(福地)를 얻는 것이 어찌 선영 곁에 장사지내는 것만 하겠는가. 발복설은 근심할 것이 아니다. 과인도 나중에 마땅히 그곳에 장사를 지내되 봉분은 같이 하고 석실만 별도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잘라 말했다. 이에 따라 미리 동분이실로 합장을 정해 버리고 1450년 세종 자신이 승하하자 왕후 옆에 미리 만들어 놓은 석실에 안장됐다.
그 후로 조선 왕실에는 여러 비극이 끊이질 않았다. 문종은 재위 2년 만에 건강이 악화돼 39세에 세상을 떠났고 단종은 계유정난으로 폐위된 뒤 영월로 유배를 떠나 사약을 받아 죽었다. 세조도 용상에 오른 13년 뒤 지병으로 죽었다.
결국 뒤를 이어 등극한 예종은 영릉 터가 흉하니 능을 옮기자는 주장에 동조했다. 여러 곳을 물색한 끝에 여주의 어느 한 곳이 천하의 명당으로 추천됐다. 여기에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온다.
영릉을 이장하기 위해 상지관인 안효례를 비롯한 정승들이 경기도 광주·이천을 거쳐 여주의 산들을 돌아볼 때다. 북성산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비를 피하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니 멀리 한 곳에 상스러운 기운이 서린 곳이 있어 가보니 풍수적으로 매우 뛰어난 곳으로 조선 초기 도승지를 지낸 이계전의 묘가 있었다. 그런데 이계전을 장사지낼 때 지관이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어떤 일이 있어도 봉분이나 비각을 만들지 말라.”
그러나 세도가였던 후손들은 그 말을 무시하고 봉분을 큼직하게 만들고 재실까지 남보란 듯이 지었다. 그 바람에 눈에 불을 켜고 명당을 찾던 안효례에게 딱 걸려 국법에 따라 강제로 이장을 당했다.
옮겨갈 장소가 결정되자 영릉은 세종을 장사지낸 뒤 19년 만인 1469년 새로 만들어졌다. 그 때 옛 영릉에 설치됐던 석물들은 여주까지 운송하기 어려워 그 자리에 묻었다. 그런데 파헤쳐진 석실 안에는 물이 들어차 세종과 왕후의 시신은 말할 것 없고 입은 수의 한 올도 썩지 않은 채 장사를 지낼 때와 똑같았다고 전해진다. 영릉 터를 처음 정할 때 흉지라고 말한 지관의 주장이 결국 옳았음이 증명된 것이다.
여주로 영릉이 옮겨지자 그 능지가 천하의 명당이라 조선의 국운이 백년이나 더 연장됐다고 해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란 말이 생겼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도 ‘영릉은 장헌대왕(세종)이 묻힌 곳이다. 땅을 팔 적에 오래된 표석을 얻었는데, 그 곳에 마땅히 동방의 성인을 장사지낼 터’라는 기록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천하의 명당을 구경하고 싶다면 우선 영릉을 둘러보자. 땅의 기운이 얼마나 대단하면 국가의 운명을 백 년이나 더 연장할 수 있었겠는가.
주변 모습이 풍수교과서대로 잘 짜여있고 산에서 능으로 입수한 지맥의 생기가 활달해 좌향까지 길하게 놓아져 있다.
고제희 대동풍수지리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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