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동아일보 해직후 한길사 설립
37년간 책 3000여권 세상에 내놔…국가·사회 부흥위해 독서운동 필요
경기 파주시 출판단지에 있는 사옥 꼭대기 층의 사무실에 들어서니 그는 커다란 붓을 들고 글씨는 쓰고 있었다.
널따란 탁자 위에 펼쳐진 화선지에 큼지막하게 쓴 글자는 딱 한 자. '冊(책)'이다.
정자체가 아니라 조형미를 살려 쓴 글씨라 문외한의 눈으로는 제법 근사해 보인다.
“우리나라 사람들 글씨가 너무 무너졌어요. 어른 애 할 것 없이 말이죠. 그래서 최근 들어 서예운동을 하고 있는데 올가을 전주에서 열리는 서예비엔날레에 아마추어 글씨를 전시하는 코너도 만든다며 저한테도 (작품을) 내라고 해 써보고 있어요. ‘책책(冊)’자가 상형문자라 옛날 서체를 살려 썼더니 못 써도 그럴싸해 보인대요, 하하.”
37년째 책 만드는 일에 종사하며 3000여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은 김언호 파주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67·한길사 대표). 넓은 그의 방은 사무실이라기보다 서재나 자료실에 가깝다. 그는 동아일보 기자 시절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에 항거하다 1975년 해직됐다. 이듬해 12월24일 한길사를 설립한 뒤 《한국 민족주의의 탐구》《우상과 이성》《해방전후사의 인식》 등 시대정신을 담아낸 책들로 지성계를 이끌었다. 그의 방에는 이런 책들의 초판본을 비롯한 책과 화집, 인터뷰 녹음 테이프, 그림, 서예작품 등이 즐비하다. 방을 한 바퀴 둘러보는 데도 꽤 시간이 걸릴 만큼 많은 이야기가 얽혀 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저녁을 먹으러 나선다. 김 이사장과 함께 차를 타고 향한 곳은 파주 출판도시에서 가까운 파주시 탄현면 대동리의 토속음식점 ‘고향’. 그가 헤이리의 친구나 지인, 책 저자 등 손님들과 자주 찾는 단골집이다. 김 이사장은 “음식점 주인의 인심이 워낙 좋은 데다 식재료도 대부분 주변 텃밭에서 주인이 직접 기른 것을 사용해 마치 시골집에 온 듯한 기분이 드는 곳”이라며 입이 마르게 칭찬했다. 도착해보니 정말이다. 음식점 주변 텃밭에는 부추, 콩, 들깨, 가지, 오이 등이 자라고 있다. 음식점 주인 길숙자 씨는 “봄에 씨를 뿌린 것”이라며 민들레와 부추 등을 곧바로 채취해 보여준다.
김 대표는 요즘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사진전을 열고 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자연스럽게 사진전 이야기가 나왔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굉장히 중요한 공간입니다. 6·25전쟁과 함께 형성되기 시작한 골목인데 피난시절 한국인들이 책을 읽으며 고단한 세월을 위로받았을 겁니다. 제가 1961~64년 부산상고에 다닐 때 대신동 하숙집과 서면의 학교를 오가며 이 골목을 3년 동안 들락거렸는데 임팩트가 너무 강했죠. 책이 귀한 시골 밀양에서 거기에 가니까 책이 너무 많아 ‘책의 바다’처럼 느껴졌거든요. 제가 찍은 고서와 헌책, 책방, 책 읽는 모습 등의 사진을 그곳 우리글방 서가와 북카페에서 전시하고 있는데 이건 사진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사진을 통해 책을 이야기하자는 겁니다. 다행히 반응이 참 좋습니다.”
이즈음 주인이 방금 뜯은 민들레와 부추 등 푸성귀로 무친 모둠겉절이를 내온다. 보기만 해도 생기가 돈다. 오이물김치, 배추김치 등 다른 반찬들도 소박하게 밥상을 차지했다. 화려한 꾸밈새는 없지만 인정과 옛맛이 담긴 상차림이다.
책 이야기가 나오자 김 이사장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우리 국민, 특히 젊은 사람들 손에서 책이 멀어져 큰일이라는 얘기다. “책을 읽지 않다 보니 젊은이들의 지력 저하 현상이 두드려져 대학생이 강의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실정”이라며 “지력이 낮은데 정의로운 사회가 가능하겠느냐, 도덕적인 사회가 가능하겠느냐”며 “37년째 책을 만들면서 가장 심각하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그가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도, 출판도시에서 북소리축제와 어린이 책잔치 등을 열며 새로운 독서운동을 모색하는 것은 이런 걱정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고 이대로 가다간 30~40년 후엔 정말 심각해져요. 지적 토대가 없이는 창조적 상상력이 나올 수가 없으니까요. 책은 교육, 정치, 경제 등 모든 것과 관련돼 있는데 저는 출판을 한 권의 아름다운 책을 내 삶의 한가운데 놓는 운동이라고 생각해요. 책 없이, 책을 읽지 않고는 비즈니스도, 과학도 잘될 수 없습니다. 요즘 수준 높은 문학작품이 나오지 않는 것도 이런 지적 천박성이 문학에도 반영돼 있기 때문이에요.”
김 이사장은 “40년 가까이 치열하게 생각하며 책을 만들 수밖에 없던 현실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현실이 엄혹했던 만큼 더 고민하고 노력해야 책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요즘 책은 너무 쉽게 만들고, 책에 대해서도 쉽게 생각한다고 지적한다. 인문학 대중화로 예전에 비해 많은 사람이 인문학 서적을 접하고 읽지만 수준은 하향 평준화됐다는 것. 그는 대중만 지향하는 인문학 출판 풍토를 ‘인문학 포퓰리즘’이라고 경계했다.
드디어 메인 요리인 닭백숙과 붕어찜이 들어왔다. 김 이사장은 “야 맛있게 생겼다”며 감탄한다. 자주 온다면서도 늘 감탄하는 모양이다. 주인은 붕어찜을 가리키며 “어제 바깥양반이 강원도에서 잡아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붕어와 일체가 된 무청시래기 맛이 일품이다.
“국가와 사회를 일으켜 세우는 데 책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다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어 안타까워요. 정책담당자도, 출판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책만큼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해선 안 됩니다. 좋은 책을 내는 사람들을 칭찬하고 도와줘야 돼요. 국내 저술과 저술가를 보호하지 않는 것도 심각한 문제고요. 신문에 나오는 책 기사를 보면 70~80%가 번역서잖아요. 출판계가 국내 저술은 여러 모로 힘드니까 안 내려고 해요. 국내 저술을 활성화하려면 역량 있는 편집자를 많이 육성해야 합니다.”
1960~70년대 과학기술자들이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데 주도적으로 역할을 한 것처럼 이제는 지식문화산업을 기획·연출하는 문화기획자, 콘텐츠 에디터가 많아야 한다는 얘기다. 20~30년 경력의 편집자가 많은 일본은 그래서 부러움의 대상이다.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적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의 역할인데 독서를 하지 않으면 그런 상상력이 나오지 않아요. 인문적 토대가 있어야 하니까요. 그 토대를 뒷받침하는 게 지식이고 책이고 독서력인데 우리는 다른 쪽으로 가고 있어요. 스마트폰, 디지털이 유용한 면도 있지만 몰라도 되는 정보를 너무 많이 공급하고 사람들은 거기에 젖어 있죠. 그러다 보니 책읽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요.”
김 이사장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함께 가야 한다”며 “지금은 너무 쏠려 있다”고 걱정했다. 종이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전자책도 안 읽는다며 종이책 우선론을 편다.
김 이사장의 마음은 바쁘다. 출판도시 이사장으로서 할 일이 많아서다. 출판단지에는 출판사, 인쇄회사 등 300개 정도가 입주해 있다. 출판도시 활성화를 위한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지금까지는 출판단지가 책을 만드는 데 집중했지만 앞으로는 독자들이 찾아오는 광장으로 바꿀 생각이다. 현재 40개인 책방을 100개로 늘리고 북카페도 많이 들어서게 할 방침이다. 대통령이 문사철(文史哲)을 강조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유명 저자 100인의 1000강좌, 아시아작가대회 개최도 추진 중이다. 내년에는 파주칠드런북어워드도 마련할 작정이다. 작가, 광고·영화기획자, 일러스트레이터, 애니메이터 등 창조자들을 위한 대규모 쇼도 한판 벌이고 싶다고 했다.
“대부분의 출판사는 영세해 돈이 많이 드는 대규모 기획, 수준 높은 인문학 서적을 내기란 꿈조차 꾸기 어렵죠. 그런 점에서 ‘대우학술총서’는 정말 기념비적입니다. 지금도 기업들이 조금만 도와주면 큰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경제신문이니까 이런 거 좀 크게 써주세요. 대우학술총서 같은 게 많이 나오게요.”
2시간 남짓한 시간에 김 이사장은 참으로 많은 걱정과 지적, 제안을 쏟아냈다. 주인이 디저트로 씀바귀와 냉이를 발효시킨 효소차를 내왔다. 달콤쌉쌀하면서 향이 은은하다. 해소·천식에 좋다는 곰보배추 효소도 곁들였다. 문 밖으로 나서니 긴긴 여름해가 다 넘어가고 캄캄한 밤이다.
김언호 이사장의 단골집 '고향'
직접 잡은 민물고기 요리로 '시골 맛' 그대로
경북 의성 출신의 김숙자 씨가 운영하는 경기 파주시 탄현면 대동리의 토속음식점. 파주에서 자유로를 따라 문산으로 향하다 성동IC로 빠져 성동네거리에서 파주맛고을로 들어서면 된다.
메뉴는 단순하다. 닭백숙과 닭매운탕, 민물매운탕 세 가지가 기본이고, 계절특선 메뉴로 붕어찜을 내놓는다. 백숙은 토종닭이어서 약간 질긴 듯하지만 담백하다. 직접 잡은 민물고기로 끓여내는 민물고기 요리도 시골맛 그대로다. 얼큰한 붕어찜에 든 무청시래기맛도 일품이다. 오이물김치, 민들레 겉절이 등 집 주변 텃밭에서 키운 채소들로 반찬을 내온다. 디저트로 내놓는 씀바귀·냉이 효소차도 독특하다.
닭백숙·닭매운탕 4만5000원, (민물)잡고기매운탕과 메기매운탕은 4만5000원(大)·3만5000원(中), 붕어찜은 5만원. (031)944-2665
파주=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해운대 밤, 아찔한 차림의 男女가 낯뜨겁게…
女직원, 유부남 상사와의 불륜 실상은…'경악'
차승원 아들 '성폭행' 고소女, 알고보니…충격
한혜진 사주 보니 "웬만한 남자로는 감당이…"
클라라 "섹시 이미지 싫다"며 울더니 또…
[한국경제 구독신청] [온라인 기사구매] [한국경제 모바일 서비스]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경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국온라인신문협회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