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년이란 조선시대 가장 오랜 재위기간을 가진 임금 영조. 그는 임금이 되는 과정부터가 당쟁의 연속이었으니, 당쟁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임금이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그 스스로도 자신의 가장 큰 치적으로 탕평(蕩平)을 들었겠는가. 크게 보자면 ‘경종-소론’ 대 ‘영조-노론’의 구도 속에서 시비(是非)를 다투다 충역(忠逆)으로 변질됐는데, 영조 4년에 일어난 반란은 충역이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실재한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물론 반역은 반역으로 처단하면 됐지만, 출발이 당쟁이라는 점에서 충과 역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를 맞물면서 끝없는 정쟁으로 치달았다. 영조의 탕평정치는 바로 이런 과정에서 탄생한다.
영조는 10년 7월13일 희정당에서 당시 이조판서인 김재로를 만난다. 김재로가 탕평인사 처리 원칙에 반발했기 때문이다. 영조는 이를 설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들은 충신입네 역적입네 하지만 도대체 역적이 누구고 충신이 누구더란 말이냐. 나나 황형(경종)이나 모두 선왕(숙종)의 혈육이며, 나는 황형을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나에게 충신이 황형에게 역신이 되며, 나에게 역신이 황형에게 충신이 된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된다는 것이냐.”
이른바 쌍거호대(雙擧互對)라는 탕평방식은 이편 한 명을 쓰면 저편 한 명을 쓰는 고식적 방식이다. 당연히 신료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돼 있다. 어느 쪽도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조라고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저렇게 다독거리고 있지만 조정 신료들이 시와 비를 다투다가 충과 역으로 갈려진 상태에서는 어느 한쪽의 완전한 패퇴가 아니고서는 도대체 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말이 탕평이지 화합한 상태를 의미하는 탕탕평평(蕩蕩平平)과 근본적으로 거리가 있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저처럼 고식적인 탕평이 실효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하게 어느 당이건 극단파를 배제했기 때문이었다. 정쟁 속에서 자라나는 극단파는 정쟁이 심할수록 선명투쟁을 하고, 그럴수록 더욱 극단화된다. 이런 경우 대개는 극단파가 득세하는데, 극단파의 논리는 쉽고 통쾌해 여론의 지지를 쉽게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단파엔 타협이란 없으며, 권력의 독점을 목표로 끝없이 정쟁한다. 영조가 말한 이 조선과 저 조선이란 바로 이런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영조는 어떻게 극단파를 배제할 수 있었을까. 온건파를 등용하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 줌으로써 자당 내의 온건파가 극단파를 비판하고 구축하도록 한 것이다. 말하자면 당파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당 스스로가 극단에서 벗어나게 해줌으로써 타협이 숨쉴 틈을 준 것이다. 영조라고 하여 자신에게 충절하는 것이 싫었겠는가만 충성으론 충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정문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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