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이 도대체 뭐길래…인생 전부를 걸었나

입력 2013-08-21 17:02   수정 2013-08-22 05:09

김창열 화백 갤러리 현대서 회고전
제주에 200점 기증…미술관 건립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두 허(虛)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가 곧 물방울 작업입니다. 언제나 다가갈 수 없는 착각으로 물방울을 그립니다. 제 인생 전체를 건 긴 여정이죠.”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날마다 화구 앞에 앉아 붓질하는 ‘물방울 작가’ 김창열 화백(84). 오는 29일부터 내달 25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개인전을 여는 김 화백은 “작은 물방울 한 점 한 점을 그리는 것은 무색무취한 삶의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며 이같이 말했다.

평북 신의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 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 판화를 공부한 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한 김 화백은 국내외 화단에서 캔버스에 빛과 생명, 우주를 묘사하는 ‘물방울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동안 파리비엔날레와 상파울루비엔날레 등 세계 유수의 미술전람회에 참가했으며, 파리 앙리코 나바라 갤러리, 뉴욕 스템플리 화랑, 독일 스프릭 화랑, 파리 죄드폼 미술관, 베이징 중국국가박물관, 국립대만미술관에 잇달아 초청돼 세계적 화가로 위치를 굳혔다. 작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화업 50년을 맞아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물방울’ 시리즈를 비롯해 한자와 물방울을 조합한 ‘회귀’ 시리즈, 모래 위에 오일로 작업한 작품, 나무 위에 아크릴로 물방울을 그린 작품 등 대작 40여점을 건다. 평생을 바쳐 모색해온 주제이지만 이번 전시작에서 그의 예술세계 전체를 조망해볼 수 있어 더욱 의미가 크다.

김 화백은 1970년대 작품을 가리키며 “저기 작은 물방울에서부터 50년간의 작업이 시작됐다”며 “이번 전시는 한 점의 물방울에서 무궁한 생명과 빛이 나오는데 50년이 지나 그것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주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한 초기엔 프랑스 신문지 위에 그렸어요. 활자 위에 물방울을 그려넣으면 더 투명한 느낌이 살아나지요. 흰 종이 위에 그리는 것보다 좋아요. 후에 이것이 캔버스로 바뀌었죠.” 그는 원형 액체를 캔버스에 재현하며 우주적 공(空)과 허(虛)의 세계로 파고들었다. 너무 흔해서 무심코 지나치곤 하는 물방울에 삼라만상의 이치가 투영돼 있다고 그는 믿는다.

“캔버스 위에 둥실 떠 있는 물방울에 생성 진화 소멸 등 무한한 가능성이 교차하는 우주를 담으려 노력해왔죠. 1972년 파리 근교 마구간 작업실에서 세숫물이 튀어 캔버스에 붙어 있는 물방울을 보고 ‘바로 이거다’ 생각했죠. 그렇게 물방울 그리기 시작해 지금까지 500여점을 완성했어요.”

그의 그림에는 언제나 초롱초롱 빛나는 물방울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작고도 큰 호수는 공과 허의 물결로 출렁거린다. 1986년 이후 천자문을 활자체나 서예체 형태로 화면 바탕에 깔고 물방울과 조화시킨 뒤에는 그 의미가 더 깊어졌다. 물방울들은 문자 위에 영롱하게 맺히면서 음과 양, 무한과 유한의 사상과 어우러졌다. “천자문은 할아버지에게 배웠습니다. 종이를 아끼기 위해 연습한 글씨 위에 수없이 겹쳐 쓰면서 서예 공부를 하던 그때가 생생하네요.”

화폭 바탕에 깔린 한자들은 천자문에서 부분 부분 추출한 글자이다. 6·25전쟁 당시 제주에서 피란 생활을 한 김 화백은 제주시에 작품 200여점을 기증하고 인근 예술인 마을에 미술관을 짓기로 협약을 맺었다. (02)2287-35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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