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트란 스포츠 분야에서 선수 또는 단체와 계약을 맺고 계약의 상대방을 직간접적으로 대신해 이익을 창출하는 사람 또는 그러한 업무를 수행하는 단체나 기관을 말한다. 즉 운동선수를 대신해 구단과 계약을 체결하고 광고와 행사 출연 등을 계획하며, 후원과 스폰서십을 주선하고 관리하는 것이 에이전트인 것이다.
이런 에이전트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곳이 바로 미국의 프로야구 리그인 메이저리그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 메이저리거 박찬호와 김병현 선수의 에이전트로 활약했고 현재도 추신수와 류현진 선수를 담당하고 있는 에이전트 ‘스콧 보라스’의 경우, 관리하는 선수만 200명에 육박할 정도다. 하지만 국내 프로야구 팬들에게 에이전트는 익숙하지 않은 존재다. 이는 구단과 선수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국내 프로야구는 에이전트 제도를 시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의 규약을 보면 구단과 선수 간 계약은 구단과 선수가 직접 대면해 체결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단, 선수가 에이전트를 선임해 계약을 체결하고자 할 때는 변호사만을 에이전트로 해야 하며, 이외의 그 누구도 계약에 관여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자격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국내 프로야구 선수도 에이전트를 둘 수 있는 여건은 조성돼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해외 진출을 도모하는 일부 선수와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외국인 선수를 제외하고 한국 프로야구에서 에이전트를 활용하고 있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에이전트 제도의 시행을 가로막고 있는 또 다른 규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갑·을 계약의 불합리성
KBO는 2001년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하여 선수가 구단과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야구 규약을 개정했다. 이전까지는 에이전트 선임이 일절 허용되지 않았는데, 이것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공정거래위원회가 판단해 시정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KBO는 규약을 개정하면서 부칙에 에이전트 제도의 시행 시기는 프로야구의 여건 등을 고려해 추후에 관계자들의 합의를 통해 별도로 정한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한국 프로야구는 관중 700만명 시대를 맞이하며 국민 스포츠의 위치에 올라섰고, 올림픽과 월드 베이스볼클래식 등에서 선전하며 한국야구의 위상을 만방에 떨쳤다. 또한 NC와 KT 등 신생구단이 생겨나는 2015년부터는 10구단 체제를 맞이하게 된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프로야구의 여건이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해진 것이다. 규약에 명시된 고려해야 할 프로야구의 여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에이전트 제도의 시행을 논의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에이전트 제도를 시행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제도의 부재로 인해 나타나는 정보의 비대칭과 그로 인한 부작용에 있다. 야구 전문가들은 한국 프로야구의 문제점 중 하나로 구단과 선수 간에 체결되는 연봉계약의 불합리성을 지적한다. 많이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연봉계약 관계에서 구단은 ‘갑’, 선수는 ‘을’의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 프로야구계의 현실이다. 이로 인해 적지 않은 수의 선수들이 연봉 협상 과정에서 협상은 고사하고 구단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해진 연봉을 통보받고 있다. 간혹 자신의 성적과 데이터를 들이밀면서 연봉 협상을 주도하려는 선수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가 많지 않고, 있다고 해도 여러 이유로 구단의 제시액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연봉 협상 과정에서 힘의 균형이 구단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구단과 선수 사이에 정보의 비대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유 정보가 다른 거래 당사자
정보의 비대칭이란 거래를 하는 과정에서 거래의 당사자 간에 가지고 있는 정보의 양이 서로 다른 경우를 말한다. 중고차를 예로 들면, 중고차를 팔고자 하는 사람은 자동차의 품질과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구매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경우 구매자는 정보 부족으로 나쁜 품질의 중고차를 제값 이상으로 매입할 수 있다. 프로야구의 연봉 협상도 마찬가지다. 구단들은 저마다의 기준으로 선수들의 연봉을 산정한다. 몇몇 구단은 연봉 산정에 활용하는 데이터만 수백 개에 이른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해 연봉을 산정했는지는 계약의 당사자인 선수들에게조차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뿐만이 아니다. 평생 야구에만 전념해온 선수들은 계약과 관련된 지식과 정보가 인력과 시스템을 갖춘 구단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이로 인해 구단은 연봉 계약 과정에서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다. 이런 정보의 비대칭으로 말미암아 선수들은 계약 내용을 낱낱이 이해하기 힘들고, 자신에게 매겨진 연봉이 적정한 것인지조차 판단하기 힘든 실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들어 야구계 일각에서 에이전트 제도의 시행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에이전트 제도 도입을 위한 조사에 착수했고, 정치권과 변호사협회 등도 심포지엄을 열어 에이전트 제도 시행 보류에 따른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 관련 단체들이 팔을 걷어붙인 만큼 조만간 국내 프로야구에도 에이전트 제도가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에이전트는 어떠한 사람이 되고, 또 어떠한 일을 하게 될까.
담당 선수 은퇴 후까지 계획
2000년 에이전트 제도를 도입한 일본은 변호사로 에이전트의 자격을 한정하고 있다. 미국은 선수노조의 심사를 통과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에이전트가 될 수 있다. 일례로 가수 비욘세의 남편으로 유명한 래퍼 제이지도 메이저리그 에이전트로 활동하고 있다. 스콧 보라스는 법학 박사 출신으로 법률사무소를 운영하기는 했지만, 야구선수 출신이고 약학 박사학위도 소지하고 있다. 또한 그의 밑에는 경제학자, 심리학자, 공학자 등 다양한 배경과 이력을 지닌 직원들이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는 에이전트 제도가 시행되면 일본과 미국의 제도를 절충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 경우 기존의 변호사 외에도 경영학, 경제학, 의학, 체육학 등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에이전트로 활동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에이전트는 선수를 대신해 구단과 기업 등을 대상으로 연봉, 광고, 후원 등 금전적인 계약 관계를 담당하는 것이 주요 업무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외에도 에이전트의 업무는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예컨대 시즌이 끝난 뒤 선수들의 훈련과 몸관리는 에이전트가 담당한다. 선수의 재산을 관리하고 은퇴 뒤의 계획을 마련하는 것도 에이전트의 일 중 하나다. 뿐만 아니라 팬 관리와 대외홍보, 심지어 선수의 가족들에게 각종 편리를 제공하는 것조차 에이전트의 몫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선수의 대리인이자 매니저이고 때에 따라선 집사의 역할도 하는 것이 에이전트인 셈이다. 이는 물론 선수들이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래야 선수의 성적이 좋아지고, 선수의 가치가 커져 수입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에이전트가 받는 수수료가 늘어나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국내 프로야구에도 에이전트가 활동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지나친 연봉 인상 등 부작용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존재하지만, 적어도 선수와 구단 간에 존재하는 정보의 비대칭이 해소돼 연봉 협상의 균형추는 맞춰질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판 스콧 보라스가 탄생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정원식 KDI 전문연구원 kyonggi96@kd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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