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장의 교양] (18) "정체성은 '결단'을 통해 만들어 가는 것" -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입력 2013-09-06 14:50  


“이제 곧 너는 네가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아니면 고귀한 부모의 못난 자식인지 보여주게 될 거야.”

당신은 ‘누구’ 인가요? 이 쉽지 않은 질문의 답은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쉽게 규정하곤 합니다. 엄마가 말합니다. “우리 애는 참을성이 없어요.” 애인이 다그칩니다. “넌 원래 그런 사람이야.” 새로운 결심을 했다는 말에 친구가 얘기합니다. “야! 웃기지마. 네가?” 소개팅 자리입니다. “A형이시구나, 조금 소심하겠네요.” 이런 말을 들을 때면 꼭 내가 고정된 사물 같습니다. 이미 어떤 사람인지 정해져 있는 것 같으니까요. 질문을 바꿔봅시다. 정체성은 변할 수 있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언제 정해지는 것일까요?

한 여인이 있습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의 주인공 안티고네입니다. 그녀의 삶을 보면 정체성은 이미 결정된 게 아니라 ‘결단’을 통해 앞으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첫 장면을 볼까요? 두 여인의 대화가 은밀하고 긴박합니다. 한 여인이 동생을 불러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아는지 조용히 묻습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대답을 듣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너만 듣도록 내가 너를 궁전의 문 밖으로 데리고 나온 거야.” 자초지종을 설명하더니 이렇게 덧붙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제 곧 너는 네가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아니면 고귀한 부모의 못난 자식인지 보여주게 될 거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우선 그녀들이 처한 상황부터 살펴보지요.

왕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저주의 신탁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운명은 그를 피해가지 않았습니다.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눈을 찌르고 왕위를 버립니다. 오이디푸스, 그 남자의 이름입니다. 그의 두 아들은 권력 다툼을 벌입니다. 한 아들은 왕위를 빼앗기 위해 이웃 나라의 군대까지 끌고 오고 형제간 싸움은 국가 간 전쟁이 돼버립니다. 전투 끝에 두 형제는 서로의 손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한 명은 국가를 지킨 영웅이 되고 한 명은 국가를 배신한 역적이 됩니다. 새로운 왕은 명령을 내립니다. 국가를 지키다 죽은 이는 후히 장사를 치르되 국가를 배신한 자는 매장하지 말라. 모두 숨죽이고 있는데 한 여인이 홀로 반기를 듭니다. 스스로 눈을 찌른 전 왕의 딸이자 서로의 손에 죽은 두 아들의 동생인 안티고네입니다.

<안티고네>는 바로 이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안티고네는 동생 이스메네를 불러 오라버니인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함께 매장하자고 요청합니다. 왕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스메네는 안티고네의 뜻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스메네에겐 왕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안티고네는 혼자 오라버니의 시신을 매장하고 곧 경비대에 붙잡힙니다. 안티고네는 왜 홀로 왕의 명령에 맞선 것일까요? 왕에게 끌려간 안티고네가 테바이의 왕 크레온과 벌이는 설전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크레온 : 너는 그러지 말라는 포고령이 내려졌음을 알고 있었느냐?
안티고네 : 알고 있었어요. 공지 사항인데 어찌 모를 리 있겠어요?
크레온 :그런데도 너는 감히 포고령을 어겼단 말이더냐?
안티고네 : 내게 그런 포고령을 내린 것은 제우스가 아니었으며, 하계의 신들과 함께 사시는 정의의 여신께서도 사람들 사이에 그런 법을 세우시 않았으니까요. 나 또한 한낱 인간에 불과한 그대의 포고령이 신들의 변함없는 불문율들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그 불문율들은 어제 오늘에 생긴 게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고,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크레온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배신자를 처단해 나라의 기강을 세우려는 것은 통치자로서 온당한 태도입니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크레온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따르고 있습니다. 크레온을 지배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애국심과 배신자를 향한 증오심입니다. 반대로 안티고네를 이끌어가는 건 인간의 존엄에 대한 의무감입니다. 당시 그리스 사회에서 장례는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적 권리이자 신들의 명령이었습니다. 안티고네는 죽음을 불사하며 자기를 버리고 신적인 명령을 따릅니다. 안티고네의 시야는 그래서 크레온보다 깊고 넓습니다.

크레온 : 그래도 착한 이에게 나쁜 자와 같은 몫이 주어져서는 안 되지.
안티고네 : 그것이 하계에서는 신성한 규칙인지 누가 알아요?
크레온 : 적은 죽어서도 친구가 안 되는 법이다.
안티고네 : 나는 서로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크레온은 친구와 적을 엄격하게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지만 안티고네는 죽음 앞에 동일한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주장합니다. 크레온은 국가의 이익을 말하고 안티고네는 신들의 명령을 이야기합니다. 크레온은 증오를 외치고 안티고네는 사랑을 강변합니다.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볼까요? “이제 너는 곧 네가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아니면 고귀한 부모의 못난 자식인지 보여주게 될 거야.”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이스메네는 고귀한 사람인가요, 천박한 사람인가요? 이미 그의 본질은 정해져 있는 걸까요,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극이 시작하는 시점에서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는 다를 게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상이한 결단이 그 둘을 전혀 다른 인물로 만듭니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에 맞서 인간의 근원적 권리와 신의 명령을 주장하고 그렇게 자신의 고귀함을 입증합니다. 안티고네의 고귀함은 결단과 용기의 결과물입니다. 반면 이스메네는 크레온에게 복종하는 길을 택합니다. 그리고 그 결단이 이스메네를 고귀하지 못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두 사람의 본질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사건을 통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곧 너의 본질을 보여주게 될 거라는 안티고네의 말은 어쩌면 더 고귀한 삶을 향한 결단을 촉구하는 말인지 모릅니다.

김영수 S·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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