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관상가 내경(송강호 분)은 김종서(백윤식 분)를 대면한 순간 내심 경탄한다. “(눈을 보면서) 배짱, (입을 보며) 아집, (이마를 보며) 원리원칙…. 세상의 평이 맞구나. 대단한 상이다. 그는 범이다. 호랑이.”
내경은 수양대군(이정재 분)을 마주하며 또 한 번 놀란다. “목을 잡아 뜯고 절대로 놔주지 않는 잔인무도한 이리. 이자가 진정 역적의 상이다.” 그는 범과 이리가 싸우면 이리가 이길 것으로 내다보고 온 힘을 다해 막기로 한다.
수양대군이 반대파를 숙청하고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관상가의 시점에서 포착한 사극 ‘관상’(한재림 감독)이 11일 개봉했다. 역사적 사실에 스토리를 상상으로 덧붙인 팩션 사극으로 완성도가 높다. 다양한 캐릭터가 역사적 사건에 잘 스며들면서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거듭났다. 익숙한 사실에 관상가라는 독특한 인물을 집어넣어 재치있게 이야기를 풀어냈기 때문이다.
처남(조정석 분), 아들(이종석 분)과 산속에 칩거하고 있던 내경은 관상 보는 기생 연홍(김혜수 분)의 제안으로 한양으로 와 사람들의 관상을 봐주는 일을 하게 된다. 용한 관상쟁이로 이름을 얻으면서 김종서로부터 사헌부를 도와 인재를 등용하라는 명을 받는다. 내경의 명성을 들은 수양대군은 다른 사람을 그 앞에 자신인 것처럼 내세운다. 관상을 본다는 것은 미래를 내다보는 것인데, 반역을 꿈꾸는 자신의 계획을 감추기 위한 간계였다.
영화를 관통하는 사상은 운명론이다. 사람의 얼굴에는 운명이 적혀 있고 이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이를 거역할 수 없다. 내경도 앞날의 비극을 내다보면서도 바꿀 수 없다.
다양한 캐릭터를 음미하는 맛이 뛰어나다. 송강호 이정재 김혜수 백윤식 조정석 이종석 등 일급 배우들을 한자리에 모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복숭아꽃처럼 붉은 도홧빛이 감돌고 무당 끼가 있다는 연홍 역 김혜수, 목젖이 튀어나온 게 성질을 못 죽여 패가망신할 상이라는 처남 역 조정석, 관직에 진출하면 칼을 맞을 것이란 아들 역 이종석 등 관객들은 극 중 배역과 이들의 관상을 매치시켜보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화려한 캐스팅에 비해 스토리 뒷심이 약간 부족하다. 운명을 거부하려는 인물들의 악착같은 노력과 그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에피소드를 더 넣었더라면 우리네 존재의 비극성을 좀 더 부각할 수 있지 않았을까.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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