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마음을 서양의 조형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말하기는 쉬워도 이처럼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도 드물다. 건축가로 더 잘 알려진 민병훈 화백(73)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25일부터 오는 10월1일까지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열리는 그의 네 번째 개인전은 이런 물음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서울대 건축공학과를 나와 미국에 유학, 워싱턴대 건축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뉴욕 제너럴푸드 본사 사옥 신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증축 설계를 맡는 등 오랫동안 정상급 건축가로 활동했다. 1988년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 대한보증보험 대한투자신탁 사옥을 설계했다.
그가 화가로 변신한 것은 2003년 무렵. 남들처럼 은퇴 후 소일거리로 붓을 잡은 게 아니었다. 젊은 시절부터 가슴에 묻어둔 화가로서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개성적 조형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밤낮없이 작업실을 지켰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은 ‘북한산의 봄’ ‘눈 덮인 도봉산’ 등 서울 주변 산의 사계절을 주제로 한 작품 28점이다. 언뜻 보기에 상투적 테마 같지만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대상을 추상화해 이런 우려를 씻어냈다. ‘백운대 능선의 봄’의 경우 마치 “세계는 원통 원뿔 구체로 이뤄져 있다”는 폴 세잔의 생각을 압축한 것 같다. C자형으로 포물선을 그린 산의 능선은 기다란 원통을 잇대어 놓은 듯하고 산 아래 나무들은 구체(球體) 형상을 띠고 있다.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대상의 모습을 한데 결합한 입체파의 원리도 눈에 띈다. 그러나 세잔과 입체파가 대상을 분석적으로 해체해 나간 데 비해 민 화백은 그것을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얼기설기 결합된 모습으로 바꿔 놨다. 우주 자연을 유기적 통합체로 바라본 동양적 세계관의 반영임과 동시에 견고한 유기적 구조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건축가로서의 치밀함이 결합된 것이다.
채색도 겉보기에는 야수파나 표현주의자처럼 화려하다. 그러나 그 화려함은 궁궐건축의 단청에서나 볼 수 있는 단아하고 절제된 색조에 바탕을 둔 것으로 서구의 들뜬 분위기와는 차이가 있다.
“예술가의 생명은 개성이라고 생각해요. 작품에서 개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화가라고 자부하기 어렵지요. 누가 봐도 민병훈의 작품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멋쩍게 웃는 노화가의 얼굴에서 만만치 않은 청년의 패기가 느껴졌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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