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이 불붙었을 때 영국은 이미 금융 강국이었다. 중앙은행이 독점적으로 화폐를 발행하던 다른 유럽국들과는 달리 영국 은행들은 독자적으로 은행권을 발행했다. 영국 기업들은 다양한 민간 은행을 통해 손쉽게 자본을 조달할 수 있었고 이것이 산업혁명에 필수적인 거액투자를 가능하게 했다. 산업혁명은 금융 시스템 발달의 결과였다.
영국 금융 제도의 핵심에 런던의 금융중심지 더 시티(The City·City of London)가 있었다. 런던 중심부에 위치한 2.9㎢ 넓이의 좁은 구역이다. 하지만 500여개의 금융회사가 있고 금융업 종사자만 약 30만명이다. 위세가 과거만 못하지만 지금도 시티는 세계금융의 중심지다. 장외 파생상품의 45%가 이곳에서 거래된다. 금융회사 외에 귀금속점도 즐비하다. 로마에 바티칸, 런던에 시티라고나 할까.
더 시티에 언제부터 금융회사들이 모여들었는지 기점을 잡기는 어렵다. 다만 1571년 그래셤의 법칙으로 유명한 토머스 그래셤이 이곳에 왕립증권거래소를 설립하면서 금융회사들이 모여들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1694년 유대인 자본에 의해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되면서부터 본격적인 금융가(街)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베어링 브러더스가 1772년에, 로스차일드가 1804년에 이곳에 각각 문을 열었다. 1850년까지 이곳에 세워진 은행들만 26개였다. 당시 영국 전체 인구의 0.55%인 시티 주민이 전체 소득세의 24.9%를 냈을 만큼 영국의 부는 이곳에서 창출됐다. 이들 은행은 공동 이익을 위해 제휴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사업에 투자했다. 철도나 가스 전기사업 등이 모두 여기서 자본을 조달했다.
시티는 금세기 들어 점차 조락의 운명을 맞는다. 영국 정부는 대영제국 권력의 상징인 더 시티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 금융 자본은 물론 냉전시대엔 옛 소련의 자본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1986년엔 대처 총리가 빅뱅이라고 부르는 일대 자유화 조치를 취하면서 전기를 맞기도 했지만 잇따른 금융위기와 리보 금리 부정 등 각종 악재를 맞으면서 영광은 점차 과거의 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영국 재무장관 조지 오즈번이 중국을 방문해 중국 은행의 더 시티 진출을 적극 권유했다는 소식이다. 관련 법규까지 고치면서 규제를 대폭 완화해 중국 자본을 끌어들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물론 FT 등 영국 언론은 오히려 시티의 안정을 해칠까 우려한다. 지난 6월엔 아베 일본 총리가 이곳을 방문해 상호협력을 공언하기도 했다. 더 시티는 아직 살아있는 것인가.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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