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과거의 나에게 부치는 편지

입력 2013-11-01 21:54  

미래가 불투명해 막막했던 시절
좌절 말고 그 불확실성 즐겼어야
원하는 것 있는 삶이 의미 있거늘

신수정 문학평론가·명지대 교수 ssjjjs@hanmail.net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나 역시 이런저런 이유로 거주지를 옮겨 다니는 일이 잦다. 그러다 보니 제때 우편물을 받지 못해 간혹 이전 주소지로 우편물을 찾으러 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얼마 전에도 그럴 일이 있었다. 전 주소지로부터 우편물이 쌓여 있으니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고도 늘 실행하지 못하던 차에 근처에 갈 일이 있어 갑작스럽게 오래전 살던 곳을 방문하게 됐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10여년 이상을 거주했던 곳이라 외곽순환도로를 지나 톨게이트에 진입하자마자 익숙한 풍경에 말할 수 없는 친밀감이 몰려왔다.

그 친밀감의 정체를 노스탤지어라고 할 수 있을까. 박제된 과거의 시간이 거리 곳곳에 점점이 박혀 있었다. 태권도장, 피아노학원, 스포츠센터, 쇼핑몰, 공원.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도시 외곽 곳곳이 나의 지난 삶을 웅변하는 증거들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넋을 놓고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아직 어렸을 때 무수히 드나들던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 모래들은 가을 햇살 아래 빛나며 그때의 내 아이 또래로 보이는 또 다른 아이의 손등에서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이 하늘, 이 바람, 이 냄새. 모든 것이 여전했고 또 그대로였다. 나는 어느새 시간을 거꾸로 달려 과거의 나로 되돌아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곳에 살던 시절을 꼭 행복했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래는 불확실했고 현재는 막막했다. 물론, 그 시절 나는 젊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 만큼 불안과 시련이 젊음의 공통분모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 내가 감당하고 있던 삶의 무게가 덜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어떤 일반화에도 해당되지 않는 자기만의 상처가 있기 마련이다. 어떻게 보면, 10여년 전 내가 살던 곳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내 상처를 확인하는 공간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곳을 그토록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런데 실로 오랜만에 나는 그 시절, 그 공간을 갑작스럽게 마주 대하며 사무치는 그리움을 맛보았다. 그리고 그 당시 나의 좌절과 절망이 엄살이거나 과장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 불확실한 미래에 보다 충실했어야 했다. 불안을 방패삼아 좌절하기 이전에 그 불확실함을 좀더 즐겼어야 했다.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꼭 불행한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어야 했다. 원하는 것이 있는 삶이야말로 진정 의미 있는 삶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10여년이 지나 과거의 시간을 반성하며 적어도 이런 식의 반성과 후회를 하지는 않도록 했어야 했다.

우편물을 수령하고 나오며 보니 장이 섰다. 그때나 이제나 아파트 단지 안에는 장이 서고 지는 모양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챙기는 한편, 서로 간의 안부를 물으며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들의 얼굴이 환하지만은 않다. 그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그들은 바로 나의 과거의 한 시절이니까.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그들을 질투했다. 아무려나, 그들에게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그들은 젊고, 젊은 만큼 그들의 얼굴을 환하게 만들지 못한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뛰어넘을 것이다.

아아, 나는 비로소 나의 나이듦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젊을 때 제일 싫었던 것, 이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라던 위로, 그 나이든 자들의 위로를 내가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수령한 우편물은 몇몇 책들과 편지가 아니라 바로 그 자각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겠나. 나는 여전히 지나온 자의 노스탤지어 가득한 위로를 과거의 나에게 부치고 싶다. 비록 뒤늦게나마 누군가 수령해주기 바라며.

신수정 < 문학평론가·명지대 교수 ssjjjs@hanmail.net</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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