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게임, 마약 그리고 게임산업

입력 2013-11-05 21:52   수정 2013-11-06 04:52

"문화콘텐츠로 입지 다지는 '게임'
규제만능 '법률중독' 폐해 탓에
상상력·창작기반 무너져선 안돼"

이인화 소설가·이화여대 교수 lyoucg@hanmail.net



[ 김재일 기자 ] 201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엘리스 먼로의 소설 중에 ‘곰이 산을 넘어오다’라는 단편이 있다. 그랜트라는 노인의 아내가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들어간다. 그랜트가 면회를 가니 아내는 다른 노인들과 카드 게임을 하고 있다. 아내는 게임을 하다가 오브리라는 남자와 친해지고 그를 자신의 남편이라고 착각한다. 오브리의 아내가 그 모습을 보고 질투를 느껴 오브리를 데려간다. 아내는 밥도 먹지 않고 시름시름 앓는다. 그랜트는 오브리의 아내에게 찾아가 “당신의 남편이 사라지니 내 아내가 죽을 것 같아요. 제발 남편을 내 아내에게 돌려주세요” 하고 호소한다.

희극적인 설정 속에 노년의 슬픔과 페이소스를 담고 있는 이 명작은 게임과 인생의 심오한 관계를 말해준다. 게임은 어린 시절 우리를 매혹시키고, 늙어서 우리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졌을 때도 우리에게 할 일을 준다. 사회적 친교를 주고 꿈과 로망을 준다. 게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 곁을 지키는 친구이며 우리는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이다.

최근 국회에서 ‘중독 예방 관리 및 치료를 위한 법률안’(이하 중독법)이 발의 됐다. 법안의 내용은 게임을 마약, 도박, 알코올과 함께 4대 중독유발물질로 규정하고 이를 관리하는 국가중독관리위원회를 신설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입법만 하면 무엇이든지 합법이 된다는 법률중독의 폐해를 떠올리게 한다.

2013년 현재 한국의 게임 인구는 2000만명을 넘어섰다. 이 사람들은 기간의 차이는 있지만 예외 없이 ‘몰입이 지나쳐서 사회생활에 지장을 주는 상태’를 경험했다. 중독법은 국가권력이 모든 게이머들을 마약 중독자처럼 관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무서운 법률이다. 동시에 이 법은 게임 개발에 참여하는 창작자들에게 치명적인 억압과 구속이 될 것이다.

게임은 문화콘텐츠이다. 중독법은 게임으로부터 문화콘텐츠로서의 정체성을 박탈하는 것이다. 이것은 법이 창작자들에게 가할 수 있는 최악의 폭력이 될 것이다. 창작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불확실하고 불안한 노동이다. 그래서 창작은 우리가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며 작고 하찮은 상상으로부터 태어나고, 상상을 규제하는 아주 작고 하찮은 억압 때문에 무너진다.

1970년대부터 가속화된 미국 문화의 세계 지배 속에서 영국의 ‘창조산업’이 꿋꿋이 발전해 창조경제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영국의 성숙하고 관대한 법제도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우리는 개발독재시대를 통과하면서 왜곡된 법제도가 영화산업을 괴멸시키고 만화산업을 뿌리째 고사시켰던 전례를 경험했다.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는 법이란 노자의 도(道)와 같은 것이라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법이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어야 하며,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질서여야 한다는 뜻이다.

일찍이 IT한류를 이끌었던 한국의 게임산업은 지금 문화콘텐츠로 자리 잡기 위해 과도기적인 진통을 겪고 있다. 세계 최초로 온라인 게임을 상용화했던 한국 게임은 미국과 중국의 협공을 받으면서도 아직도 세계 일류의 콘텐츠로 창조경제를 선도하고 있다. 한국의 게임 개발자들은 모든 것이 갖춰지지 않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좋은 게임을 만들어서 이 어두운 나라의 상처받은 사람들이 마약 하지 않게, 부탄 하지 않게, 본드 하지 않게, 자살하지 않게 지켜주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자신의 ‘티모스(자존)’를 타인이 인정하도록 만들기 위한 처절한 투쟁의 과정이다. 입법의 권력이 주어졌다고 해서 게임을 만들고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의 자존과 인격을 모독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비극적인 오해가 될 것이다.

이인화 < 소설가·이화여대 교수 lyoucg@hanmail.net</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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