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메이커 MD(上)] 살 1파운드를 건 유통 파이터의 하루

입력 2013-11-07 09:28  

장기불황에 '규제 허들'까지 높아지면서 유통업계는 날마다 울상입니다. 1인가구가 급증하는 '솔로이코노미 시대'가 도래했고 합리적인 소비로 자체 브랜드(PL·PB) 개발도 봇물을 이룹니다. 진열대와 TV, 온라인·모바일 구분없이 오늘날 판매경쟁은 손바닥 위에서도 치열합니다. '21세기 베니스의 상인'으로 불리는 MD(merchandiser)의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꾸준한 영업력이 곧바로 유통채널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불멸의 '맨파워'로 쓰러져가는 유통기업까지 일으켜 세운 MD의 밤낮 없는 활약상을 한경닷컴 유통 기자들이 들여다 봤습니다. <편집자 주>



#1. 서울 회기동에 사는 주부 정선희 씨(43·가명)는 최근 대형마트에서 미국산 활(活) 랍스터를 1만원대에 판다는 소식을 들었다. 평소 저녁 반찬이 항상 고민이었던 김 씨는 랍스타 2마리를 3만원이 채 안되는 가격에 구매해 이날 저녁거리 고민을 해결할 수 있었다. 평소와 달리 '별미'가 올라온 저녁상을 본 남편과 아들은 입이 떡 벌어졌다. "요즘 대형마트에서 이런 것도 파느냐"며 놀라워했다.

#2. 경기도 수원에 사는 대학생 한은정 씨(23·가명)는 요즘 소셜커머스 애플리케이션(앱)을 들여다 보느라 정신이 없다. 다가올 겨울을 대비해 '예쁘고 따뜻한' 후드티를 구매하고 싶어서다. 한 씨는 지난 겨울에도 방한용 스타킹, 점퍼, 장갑 등을 이 앱을 통해 간편하게 살 수 있었다. 한 씨의 친구들 중에서는 보증의 어려움 때문에 오프라인 구매만 고집했던 값비싼 '명품'도 요즘에는 소셜커머스 앱을 통해서도 믿고 구매할 수 있다고 전했다.

16세기 후반 이탈리아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은 '1파운드의 살'을 담보로 차용 증서를 쓰며 '인육 계약'을 했다. 21세기 머천다이저(merchandiser, MD)는 '신뢰와 책임'으로 소비자들의 재판을 받는다.

통상 소비자들은 필요한 상품을 가장 쉽고 빠르게 구입하길 원한다. 더욱이 유통채널이 갈수록 다양해지면서 유통채널들은 고객 단 한 명이라도 빼앗기 위해 피 말리는 경쟁을 벌인다. 소비자의 눈에 가장 잘 띄는 매대가 어디인지, 고객들은 현재 무슨 제품에 관심을 보이는지, 가장 빠른 배송 방법은 무엇인지 등을 날마다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리고 이들 유통채널 한 복 판에 '머천다이저(merchandiser, MD)'가 서 있다.

유통 MD는 최근 트렌드와 소비자의 요구를 파악해 판매 가능한 상품을 골라내고, 효과적인 판촉과 마케팅을 통해 매출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는다.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에 대한 구매계획과 판매계획, 상품구매, 판매관리, 재고관리 등 유통 전반을 조종하는 전문가이기도 하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시중에서 볼 수 없었던 상품을 만들어내 소비자를 유혹하는 마술사와도 같은 존재로 '유통 업계의 꽃'으로도 불린다.

MD의 하루는 숨 쉴 틈이 돌아간다. 잠깐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경쟁사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상품들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MD는 새벽 출근과 동시에 전날 판매한 제품의 실적을 체크하고 경쟁사의 제품은 얼마나 팔렸는지 확인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루의 전략을 다시 짜는 일일 팀 회의를 하기 위해서다.

오후엔 협력업체와 미팅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선보일 제품을 고른다. 인터넷을 통해 해외에서 인기 있는 아이템들을 찾아내는 것도 필수다. 저녁이 되면 마트나 백화점 등 현장도 둘러본다. 재고 관리와 다음날 선보일 상품들도 점검해야 한다.

MD의 하루는 이렇게 길고 치열하다. 실제 국내 모 홈쇼핑에서 엠디로 일하는 김선영 씨(36·가명)의 하루를 쫓다 보면 제품을 발굴해서 소비자에게 전달하기까지의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끗' 차이로 소비자가 물건을 집느냐 아니냐는 바로 김 씨와 같은 MD의 손에 달려 있다.

◆ "경쟁사보다 못 팔면 팀장의 고성이 커진다"…시간당 매출에 울고 웃는 MD

김 씨는 진한 커피로 하루의 아침을 시작하는 게 습관이 됐다. 출근해서부터 퇴근하기까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일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MD는 한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언제 어느 경쟁업체에서 소위 '대박' 상품을 내놓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김 씨가 출근과 동시에 하는 일은 전날 소싱(제품을 발굴해 소비자에게 내놓는 일)한 제품의 실적을 확인하는 것이다. 김 씨처럼 홈쇼핑에서 일하는 MD라면 전날 방송의 성과를 분석하고 미진한 부분에 대한 대책을 구상한다. 동시간대의 경쟁사 실적은 어땠는지 확인하는 일도 필수다.

"MD는 매일 매일 성적표를 받아요. 일일 성적표를 바탕으로 주간 성적표가 만들어지고 이 데이터는 축적돼서 월간 성적표로 쌓입니다. 일일 매출액은 엠디의 능력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이것이 쌓이면 소비자의 트렌드를 알아차릴 수 유용한 자료가 되죠. 엠디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세련된 감각보단 오히려 데이터 분석 능력일 수도 있어요."

김 씨처럼 홈쇼핑에서 일하는 MD에겐 '판매고', 대형마트는 '매대', 백화점의 경우 '브랜드', 소셜커머스 MD는 '딜'에 목숨을 건다. 그렇지만 결국 엠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적'이다. 업계에선 가장 단시간에 가장 높은 매출을 '올려주는' MD만 올려다 보는 게 실제 현실이다.

◆ "하루 일과는 입점업체 상담 그리고 회의, 회의, 회의"…커뮤니케이션 능력 탁월해야

김 씨는 매출 데이터 바탕으로 오전 팀 회의 때 발표할 자료를 준비한다. 소비자로부터 호응도가 높았으면 추가 물량이 있는지 파악하고 그렇지 못했다면 보완책을 내놔야한다. 또 이날 만나야할 협력사 리스트를 체크해 보고하는 일도 빠질 수 없다.

"오전 일일 팀 회의는 전날의 실적을 분석하고 다음날 판매 계획을 짜는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요. 최근 이슈가 됐던 대형마트의 랍스타나 겨울 점퍼 같은 시즌 대비 상품 처럼 그때 그때 테마가 있는 사전 기획도 다 일일 회의를 통해 결정합니다. 또 다음날 선보일 상품들만 구상해선 경쟁사에 뒤처질 수밖에 없어요. 다음 주, 다음 달, 다음 시즌엔 어떤 상품들이 소비자들의 관심을 받을지 연구해서 떠오른 아이디어들을 회의 시간에 내놓기도 하죠."

팀 회의가 끝나면 협력업체들과의 미팅이 잇따라 잡혀 있다. 중소기업 상품부터 대기업 제품까지 고객들의 눈을 확 끌어당길만한 '신상'을 발굴해야 해서다. 이 시간엔 협력업체의 제안서를 검토하고 판매여부를 결정해야한다. 엠디의 '감각'이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떠오를 때가 바로 제품을 골라낼 때다.

"요즘은 유통채널이 다양해지고 상품의 수도 셀 수 없이 많아졌어요. 이럴 때 더욱 중요한 것이 고객의 생각을 반발 앞서 나가는 겁니다. 이것을 '사전기획'이라고 부르죠. '명품(名品) 기획' '전통 빵집 초대전' 등 다른 기업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품을 내놓는 것도 엠디에게 요구되는 능력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MD가 선택한 모든 상품이 고객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 건 아니다. 먼저 이들의 눈에 든 제품은 팀 회의를 통해 1차적으로 걸러지고 검품팀은 제품의 품질을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아무리 기능이 훌륭한 제품이라도 불량률이 높으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해당 상품이 검품을 통과하면 2차 회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상품선정위원회'를 거친다.

"홈쇼핑의 경우 편성팀까지 회의에 참여해요. 제품 하나가 소비자들에게 선보이기까지 최소 4~5단계를 거치는 셈입니다. 엠디 한 명이 마음에 든다고 해서 제품을 내놓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닌 거죠."

◆ "저녁 6시 커피 한 잔 마시고 다시 현장으로…또 다른 내일 '대박'을 꿈 꾼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퇴근을 준비할 저녁 6시 무렵 MD는 현장을 둘러본다. 홈쇼핑 MD는 방송PD들과 세트장에 내려가 제품 배치부터 멘트까지 꼼꼼히 점검하고 대형마트 MD는 매대를 점검하고 필요하다면 판촉사원도 자원해 일한다. 백화점 MD는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플로어(층)'와 브랜드 매장을 점검한다. 소셜커머스의 경우 다음날 사이트에 공개될 상품들을 촬영하고 웹 디자인을 완료한다.

"전쟁에서 상대가 어떤 무기를 들고 있는지 모를 때 두려움이 가장 큰 것처럼 다음 날 경쟁사에서 어떤 '대박' 상품을 내놓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엠디들은 항상 갖고 살아요. 특히 제가 맡고 있는 분야에서 소비자들이 다른 기업의 제품을 선택하는 것처럼 MD에게 큰 압박을 주는 것도 없죠. 현장을 둘러보면서 동선을 체크하고 카피문구를 점검하는 등 철저히 고객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합니다."

현장점검이 끝났다면 이제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커피 한 잔을 마신다. 하루 간의 미팅 자료를 정리하고 상품선정위원회에 올릴 제품들에 대한 기술서를 작성해야하기 때문이다. 유관부서와 협의도 대부분 저녁 시간에 이뤄진다.

"다음 날 준비가 끝나면 다시 중장기 전략을 준비해요. 끊임 없이 아이템을 찾아야죠. 다가올 시즌엔 어떤 상품들이 인기를 끌지, 최근 해외에선 어떤 상품이 고객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지 등 책과 인터넷을 통해 검색합니다. 트렌드를 읽는 자신만의 안목이 있으면 더할나위 없이 좋지만 그럴 수 없다면 인맥을 동원하든 공부를 더 하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거죠."

김 씨는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에 퇴근을 준비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쟁사 방송을 돌려보다 이날은 퇴근이 더 늦었다.

"제가 소싱한 제품이 소비자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고 그것이 매출로 이어진다면 그것만큼 보람된 일은 없죠. '대박' 상품을 낸 엠디를 업계에서 주목하는 이유도 그것이 엠디의 능력을 나타내는 척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엠디들은 '대박'을 꿈 꾸죠."

한경닷컴 정현영 기자, 노정동 기자 dong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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