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왕성한 늙음

입력 2013-11-07 21:42   수정 2013-11-08 05:43

나이들며 '왕성한'이란 말이 민망해져
늙은 사람끼리 살아도 좋겠단 생각이…

최백호 가수·한국음악발전소장



몸은 늙어도 마음은 청춘이라느니 늙을수록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내가 예쁜 여자가수 ‘아이유’의 앨범 피쳐링을 하고 에코브릿지라는 젊은 뮤지션의 곡을 받아 노래를 부르고 다니니 듣는 얘기들이다. 한자어로 노소동락(老少同樂)인가 뭐라던가. 아무튼 그렇다.

그런데 가까운 어떤 분이 언제인가 내게 넌지시 그러셨다. “있잖아, 늙으면 가만히 있어도 안 아름답다.”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다가, 그러니까 가만가만 조용히 뒤로 물러서는 것이 덜 추하다는 말이었다는 것을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사람이 제 얼굴은 볼 수가 없으니까 남을 통해 자신을 본다지만, 여태 그걸 모르고 살았다. 어느새 내게 가득한 흰머리며 짙은 주름이며 잡티들을.

얼마 전에 국립극장에 연극을 보러 갔던 적이 있다. 그런데 내 앞자리 로열석에 할머니 몇 분이 일찍 자리를 잡고 계셨는데 40대 초반 정도의 부부와 초등학생 아들로 보이는 한 가족이 티켓을 들고 조심스레 그 옆에 다가왔다. “할머니, 죄송하지만 저희들 자리인데요.” 그러자 그 노인분들이 큰소리로 “몰라요 몰라 우리는 여기 앉을 거야!” 그래서 나는 속으로 ‘아차! 이거 보기 거북한 광경이 펼쳐지겠구나’ 했는데 “네, 그러세요. 앉지 마시라는 것이 아니라 어르신들 자리를 가르쳐 주셔야 저희가 거기에 가지요.” 그때 눈치 빠르신 한 분이 얼른 티켓을 내밀자 그 세 사람은 훨씬 뒤 ‘덜 로열석’으로 조용히 가서 앉았다. 그 점잖고, 맑고, 품위 있고, 아름답던 가족. 지금도 길에서 만나면 알아볼 수 있다.

요즘은 세 사람이 식당에 가도 두 사람분만 시켰으면 할 때가 종종 있다. 그게 식욕 탓이거늘 하다가도 가끔 젊은 시절과 다름없이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친구들을 봐도 그 모습이 그리 부럽지 않은 걸 보니 식욕 때문만도 아닌가 보다. 어떤 때는, 늙으면 늙은 사람끼리 모여 큰소리 내지 않고 조용조용 살아도 재미나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내가 이렇게 ‘왕성한’이란 단어가 민망해지는 걸 보니, 나는 아마 꽤 고상하게 늙어갈 건가 보다.

최백호 < 가수·한국음악발전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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