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영연 기자 ]
1816년 이탈리아가 금본위제도를 채택한 이래 금은 물가상승과 시장가치 하락에서 자유로운 안전자산으로 여겨져 왔다. 2001년 9·11테러 당시 가격이 트로이온스(31.1g)당 1900달러를 넘어서는 등 시장의 불안감이 커질 때 가격이 오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이 같은 금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양적완화 축소 예고와 유럽 재정위기 등 악재 속에서 금값은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금을 대체할 새로운 안전자산을 찾고 있다. 뉴욕과 런던 등 주요 대도시 부동산부터 우표까지 대체 상품으로 거론되면서 가격이 요동치고 있다.
# 금 가격 1년간 27% 하락
지난해 10월 트로이온스당 1789.8달러였던 금 가격은 지난 4일 현재 1312.4달러로 하락했다. 1년간 26.67%의 하락폭을 기록했다. 가격 변동성도 만만치 않다. 지난 4월15일 금 가격은 하루 만에 9.4% 떨어졌다. 안전자산이 되기에는 가격안정성 면에서 이미 실격이다.
위기 때 금 투자가 늘어난다는 것도 옛말이다. 지난달 중순 미국의 디폴트(채무 불이행) 우려가 커지며 증시가 급락했지만 금값 역시 3.35% 하락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상장지수펀드(ETF)를 통한 투자가 늘면서 금 가격에 거품이 끼기 시작했고 이것이 투자상품에 맞먹는 변동성을 보이고 있다. 세계 최대 금 ETF인 SPDR골드트러스트는 투자자 이탈로 작년 말 이후 500t의 금을 내다 팔며 금값 하락을 이끌었다.
각국 중앙은행이 경기 부양을 지속했는데도 물가가 별로 오르지 않은 것도 한 이유다. 금이 달러, 엔화 등에 비해 우위를 가지는 것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달러 강세 전망도 금값 하락을 부채질하는 요인이다.
최대 수요처인 각국 중앙은행들이 잇따라 금 구매를 억제하겠다고 발표하는 것도 금값 하락을 부채질하는 요인이다. 중국, 인도가 최근 금 구매를 억제하는 정책을 발표하고 2010년 이후 전 세계 중앙은행 금 순매입량의 31%를 차지한 러시아도 지난달 1년 만에 금 보유량을 줄였다고 밝혔다.
# "금 대체재 찾아라" 동분서주
리스크를 피해 안전자산을 찾아 떠났던 투자자들은 손실에 당황하고 있다. 2011년 이후 90t의 금을 사들였던 한국은행은 1조2000억원의 평가손실을 입었다. 투자자들은 가치 급락 가능성이 작으면서 물가상승률 이상의 가격 상승이 가능한 안전자산을 찾고 있다.
부동산이 당장의 대안이다. 주요 도시 집값이 오르는 이유다. 영국 런던의 주택 가격은 10월 한 달간 10.2% 급등했다. 미국 뉴욕의 고급 주택 가격도 올 6월 말을 기준으로 1년간 34% 올랐다. 2009년 이후 이스라엘의 부동산 가격은 40%올랐고 노르웨이와 스위스도 각각 30%, 20% 상승했다. 독일, 캐나다 등도 매년 꾸준한 상승세를 이어갔다.
독일 분데스방크는 “안전자산을 찾는 유럽 투자자들이 독일로 몰리면서 베를린과 뮌헨 등 7대 도시의 집값에 적정수준 대비 20% 정도 거품이 끼었다”고 분석했다.
원자재 중에 가격 변동성이 낮은 목재로도 투자자가 몰리고 있다. 6월 이후 목재 가격은 28%가량 올랐으며 S&P500목재ETF도 올 들어 25.98%의 수익률을 내고 있다. 우표와 와인, 위스키 등 틈새시장을 찾는 투자자들도 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자산관리회사인 켄필드 캐피털 스트레티지의 대표 케네스 왈처는 10년 만에 자산 가치가 3배로 증가했다고 미국 경제전문방송인 CNBC는 전했다. 우표도 마찬가지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상급 우표 가격은 지난 40년 동안 연평균 11% 올랐다”며 “주식, 채권, 금보다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며 우표 수집은 더 이상 취미가 아니라 자산을 불리는 투자처로 각광 받고 있다”고 전했다.
# 금 대체 부동산은 버블론도
리스크 자체에 베팅하는 미국 변동성 지수(VIX)를 통해 리스크를 헤지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변동성이 높아질 거라는 시장의 기대심리 자체에 돈을 걸어 위기 재발 시 수익을 올리는 구조다. VIX는 향후 주식시장의 등락을 예고한다. 예를 들면 VIX가 10을 기록하면 이는 곧 한 달간 S&P500지수가 10% 등락하리라고 전망하고 있다는 뜻이다. VIX가 크면 그만큼 주식시장 변동성이 높다는 뜻이 된다. CNBC는 “VIX가 금을 대신해 새로운 위험 헤지 투자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 같은 투자자들의 움직임이 또 다른 거품을 부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는 “일부 지역에 부동산 버블이 끼고 있다”고 지적했다. 비스누 바라탄 미즈호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금을 대체하는 자산 역시 투기적 수요에 의해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위험 도피처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강영연 한국경제신문 기자 yy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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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으로 사라진 '금본위제도'
1816년 영국이 금본위제를 채택하면서 금은 세계 화폐 역사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금본위제는 일정 단위의 금에 가격을 매긴 후 이를 기준으로 해당 국가에서 사용하는 화폐 발행의 총량을 정하는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폐를 가지고 은행에 가면 누구든 같은 가치의 금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만 해도 모든 국가의 통화는 금에 고정됐다. 미국도 1900년부터 금본위제를 실시했다.
문제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각국이 금의 총량을 넘어서는 돈을 마구잡이로 찍어내면서 생겼다. 금 보유량만큼 화폐를 발행해서는 경제활동에 필요한 만큼의 화폐를 충분히 찍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대공황 등으로 금본위제 포기와 복귀를 거듭하던 주요 국가의 통화체제는 1944년 ‘브레턴우즈체제’의 탄생이라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미국은 브레턴우즈체제를 통해 ‘금 1온스=35달러’로 고정하고 달러화와 다른 나라 통화를 고정환율로 묶었다. 1, 2차 대전을 거쳐 세계 경제의 패권을 거머쥔 미국 달러화가 명실상부한 기축통화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위기는 전쟁이었다. 1960년대 미국이 베트남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달러를 대규모로 찍어내면서 통화 가치가 떨어졌다. 전쟁비용 조달을 위해 찍어낸 미 국채 보유국들이 금태환을 요구하자 미 중앙은행의 금은 바닥을 드러냈다. 결국 1971년 8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금태환 정지를 선언했다. 1976년 1월 자메이카 수도 킹스턴에서 개최된 국제통화기금(IMF) 잠정위원회에서 출범한 ‘킹스턴체제’는 금본위제도에 공식적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변동환율제가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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