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비 유학생 유길준이 미국 덤머 아카데미에 입학한 건 1884년이었지만 미국 유학이 본격화된 것은 그로부터 25년 뒤인 3·1운동 이후였다. 조선총독부가 유학생 규제를 폐지한 뒤에야 공식적으로 유학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은 지역의 큰 경사였다. 유학 떠나는 인물들을 축하하는 기사가 신문에 날 정도였다. 1930년대 들어선 매년 300명 이상이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37년에 미국 유학생이 354명이라는 총독부 통계도 있다. 전체 유학생의 절반 정도가 평안도 출신이었다. 기독교 텃밭이자 상공업이 발달해 신학문을 수용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을 것이다.
당시 미국 유학생이라는 단어는 많은 메타포를 함축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유와 실용에 기초한 자본주의 반제국주의 반사회주의가 이 단어에 깃들어 있었다. 일본 유학생의 다수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재미 유학생의 90%가 기독교 신자였다.
하지만 귀국 후엔 이들을 환호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당시 조선 실정을 잘 모르고 전공도 실용적이지 않다는 등 혹평이 잇따랐다. 유학생 중 절반이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 남은 것도 따가운 눈총을 받는 요인이 됐다. 조선총독부는 이들이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자 1938년 300원 이상의 해외 송금을 금지해 구미 유학의 길을 원천적으로 막았다.
광복 후에도 미국 유학은 1970년대까지 별로 늘지 않았다. 경제 사정도 좋지 않았지만 정부 규제도 있었다. 미국 유학생이 1만명을 넘어선 것은 1980년대 초다. 1981년 유학자유화 조치가 큰 몫을 했다. 신학문을 배우고 신세계를 경험하려는 학생들은 계속 늘어 2001년에는 5만명을 넘어섰다.
최근 들어 미국의 한국인 유학생이 줄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나온다. 미 국무부 산하 국제교육연구소에 따르면 2008~2009년 7만5065명으로 정점을 기록한 뒤 2012~2013년 7만627명으로 줄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중국이나 유럽 등 다른 국가로의 유학이 늘어났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유학생 수에서 중국과 인도에 이어 3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하버드와 MIT가 있는 매사추세츠주 등 유명 대학 밀집지역에 한국 학생들이 많다.
오히려 미국 유학생 수가 확연히 줄고 있는 나라는 일본이다. 10년 전 유학생수 3위였던 게 지금은 2만명도 채 되지 않아 7위에 불과하다. 일본 언론은 학생들의 의욕 상실과 능력 부족을 개탄한다. 세계로 나가려는 한국 젊은이들의 도전정신이 일본보다 낫다니 다행이다.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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