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범 문화전문기자의 CEO를 위한 미술산책
(21) 르네상스와 다비드상
[ 정석범 기자 ] 건장한 유대 청년 다비드(다윗). 그는 지금 막 거인 골리앗에 맞서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누가 봐도 승산 없는 싸움처럼 보이지만 그는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표정이다. 불끈 쥔 주먹과 목에는 혈관이 불룩 튀어나와 있고 눈은 적을 노려보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르네상스(‘재탄생’이라는 뜻) 시대를 대표하는 명작으로 통한다. 이 상은 다윗이 블레셋 장수인 골리앗을 돌팔매로 명중시켜 죽였다는 구약성서 ‘사무엘서’의 에피소드에 바탕을 둔 것으로 피렌체 대성당 감독관들로부터 주문받아 1501년부터 3년에 걸쳐 제작된 것이다. 5.17m 높이의 대형 대리석상인 이 작품은 원래 성당 부벽 위에 설치할 계획이었지만 이동상의 난점으로 베키오 궁전 입구로 그 위치가 변경됐다.
이 상이 르네상스의 상징이 된 배경은 뭘까. 잠시 중세의 상황을 들여다 보자 화려한 그리스 조각의 전통은 로마제국 말기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국교로 공인되면서 거의 천여년 동안 단절의 비운을 맞이한다. 우상 숭배를 엄격히 금지한 기독교 지도부가 사실적인 형상의 재현을 금지했고 종교적인 목적의 반추상적인 조각만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인들이 고전기에 이룩한 사실적 재현의 원리들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15세기 초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인간중심주의가 대두되면서 사람들은 그리스 로마시대 고전문화의 부활을 꿈꾸게 된다. 이교적인 사상으로 불온시 됐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세적 사상이 부활했고 예술도 점차 인간적인 외투를 입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잊혀진 고대 그리스 예술의 원리들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재발견됐다.
그러나 르네상스 미술은 그리스 로마의 고전문화를 액면 그대로 읊조린 것은 아니었다. 르네상스만의 창조적인 기운을 불어넣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르네상스의 상징이 된 것은 바로 그런 새 시대의 청신한 기운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겉보기에 다비드상은 그리스 고전기 조각의 원리를 그대로 따른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조각상의 모범답안을 제시한 폴리크레이토스의 ‘창을 들고 가는 남자’에 보이는 자세와 흡사하다. 무게 중심이 오른쪽 다리에 가 있고 왼쪽 다리를 걸음을 옮기는 자세로 묘사한 점이 그렇다. 하체의 무게 중심이 오른쪽으로 쏠리다보니 전체적인 균형을 잡기 위해 상체의 무게 중심을 오른쪽 어깨에 안배함으로써 균형을 잡으려 한 점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신체는 전체적으로 완만한 S자형을 그리게 된다. 바로 콘트라포스토 자세다. 8등신의 신체비례도 리시포스에 의해 정립된 그리스 후기 조각의 원리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게 다는 아니다. 사실적 재현이지만 신이나 영웅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 그리스 조각상과 달리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에서는 불뚝불뚝 고동치는 인간의 심장박동을 들을 수 있다. 잔뜩 긴장한 목의 심줄과 돌멩이를 꽉 쥔 오른쪽 손등의 돌출한 핏줄을 보라. 그리스 조각도 해부학적인 정확성을 보여주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해부학적 성과와는 비교하기 어렵다. 근육의 미세구조는 물론 실핏줄까지 정확하게 밝힌 첨단 해부학의 성과가 미켈란젤로의 신체 묘사에 반영돼있다.
게다가 다비드상의 눈초리는 결연한 전의로 가득 차 있다. 다비드상 앞에 서자마자 관객은 방어 자세를 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떨어져서 살펴보면 다비드상은 의외로 정적이다. 정중동(靜中動)이라고나 할까. 미켈란젤로에 앞서 도나텔로와 베로키오도 다비드상을 제작했지만 두 선배가 골리앗의 목을 자른 모습으로 직설적으로 묘사한 데 비해 미켈란젤로는 결투가 벌어지기 직전의 긴장된 순간을 포착했다. 선배들은 시각적 충격에 호소했지만 미켈란젤로는 관객의 심리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훨씬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실적인 재현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작가의 개성에 따라 저마다 완전히 다른 방식의 이미지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르네상스 조각은 고대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부흥시키려 했지만 그에 머무르지 않고 따스한 인간적 온기를 담으려 했다. 특히 그런 인간적 심리를 해부학 같은 당대의 자연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이 놀랍다. 아득한 옛날 구약의 인물을 생생한 우리의 이웃으로 부활시킨 점. 바로 르네상스 조각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유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
▶'박람회장 발칵' 주식 자동매매 프로그램 등장
▶ 별장으로 쓰면서 은행이자 3배 수익 받는곳?
(21) 르네상스와 다비드상
[ 정석범 기자 ] 건장한 유대 청년 다비드(다윗). 그는 지금 막 거인 골리앗에 맞서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누가 봐도 승산 없는 싸움처럼 보이지만 그는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표정이다. 불끈 쥔 주먹과 목에는 혈관이 불룩 튀어나와 있고 눈은 적을 노려보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르네상스(‘재탄생’이라는 뜻) 시대를 대표하는 명작으로 통한다. 이 상은 다윗이 블레셋 장수인 골리앗을 돌팔매로 명중시켜 죽였다는 구약성서 ‘사무엘서’의 에피소드에 바탕을 둔 것으로 피렌체 대성당 감독관들로부터 주문받아 1501년부터 3년에 걸쳐 제작된 것이다. 5.17m 높이의 대형 대리석상인 이 작품은 원래 성당 부벽 위에 설치할 계획이었지만 이동상의 난점으로 베키오 궁전 입구로 그 위치가 변경됐다.
이 상이 르네상스의 상징이 된 배경은 뭘까. 잠시 중세의 상황을 들여다 보자 화려한 그리스 조각의 전통은 로마제국 말기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국교로 공인되면서 거의 천여년 동안 단절의 비운을 맞이한다. 우상 숭배를 엄격히 금지한 기독교 지도부가 사실적인 형상의 재현을 금지했고 종교적인 목적의 반추상적인 조각만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인들이 고전기에 이룩한 사실적 재현의 원리들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15세기 초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인간중심주의가 대두되면서 사람들은 그리스 로마시대 고전문화의 부활을 꿈꾸게 된다. 이교적인 사상으로 불온시 됐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세적 사상이 부활했고 예술도 점차 인간적인 외투를 입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잊혀진 고대 그리스 예술의 원리들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재발견됐다.
그러나 르네상스 미술은 그리스 로마의 고전문화를 액면 그대로 읊조린 것은 아니었다. 르네상스만의 창조적인 기운을 불어넣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르네상스의 상징이 된 것은 바로 그런 새 시대의 청신한 기운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겉보기에 다비드상은 그리스 고전기 조각의 원리를 그대로 따른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조각상의 모범답안을 제시한 폴리크레이토스의 ‘창을 들고 가는 남자’에 보이는 자세와 흡사하다. 무게 중심이 오른쪽 다리에 가 있고 왼쪽 다리를 걸음을 옮기는 자세로 묘사한 점이 그렇다. 하체의 무게 중심이 오른쪽으로 쏠리다보니 전체적인 균형을 잡기 위해 상체의 무게 중심을 오른쪽 어깨에 안배함으로써 균형을 잡으려 한 점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신체는 전체적으로 완만한 S자형을 그리게 된다. 바로 콘트라포스토 자세다. 8등신의 신체비례도 리시포스에 의해 정립된 그리스 후기 조각의 원리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게 다는 아니다. 사실적 재현이지만 신이나 영웅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 그리스 조각상과 달리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에서는 불뚝불뚝 고동치는 인간의 심장박동을 들을 수 있다. 잔뜩 긴장한 목의 심줄과 돌멩이를 꽉 쥔 오른쪽 손등의 돌출한 핏줄을 보라. 그리스 조각도 해부학적인 정확성을 보여주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해부학적 성과와는 비교하기 어렵다. 근육의 미세구조는 물론 실핏줄까지 정확하게 밝힌 첨단 해부학의 성과가 미켈란젤로의 신체 묘사에 반영돼있다.
게다가 다비드상의 눈초리는 결연한 전의로 가득 차 있다. 다비드상 앞에 서자마자 관객은 방어 자세를 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떨어져서 살펴보면 다비드상은 의외로 정적이다. 정중동(靜中動)이라고나 할까. 미켈란젤로에 앞서 도나텔로와 베로키오도 다비드상을 제작했지만 두 선배가 골리앗의 목을 자른 모습으로 직설적으로 묘사한 데 비해 미켈란젤로는 결투가 벌어지기 직전의 긴장된 순간을 포착했다. 선배들은 시각적 충격에 호소했지만 미켈란젤로는 관객의 심리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훨씬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실적인 재현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작가의 개성에 따라 저마다 완전히 다른 방식의 이미지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르네상스 조각은 고대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부흥시키려 했지만 그에 머무르지 않고 따스한 인간적 온기를 담으려 했다. 특히 그런 인간적 심리를 해부학 같은 당대의 자연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이 놀랍다. 아득한 옛날 구약의 인물을 생생한 우리의 이웃으로 부활시킨 점. 바로 르네상스 조각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유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
▶'박람회장 발칵' 주식 자동매매 프로그램 등장
▶ 별장으로 쓰면서 은행이자 3배 수익 받는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