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대다수는 분단위 쪼개 뛰는 '노력파'
실적 압박에 무리한 영업 '유혹'
일부, 허위계약에 보험료 돌려막기도
[ 김은정 기자 ]
서울 동작경찰서는 올초 “고수익을 보장한다”며 수억원을 받아 챙긴 보험설계사 문모씨(42·여)를 구속했다. ‘950만원을 투자하면 한 달 후 2000만원을 받는다’ ‘2000만원을 내면 매달 60만원의 수익이 나온다’는 등의 말로 2002년부터 15명에게서 13억원을 가로챈 혐의였다. 문씨는 한 보험회사에서 우수설계사 상을 11년 수상한 보험왕 출신이었다. 그가 연속 우수설계사로 처음 선정된 시점은 사기행각을 시작한 2002년과 일치했다. 가로챈 돈의 상당 부분이 허위 보험계약을 위한 보험료 돌려막기에 사용됐다.
집착·과시욕…아슬아슬 ‘줄타기’
대부분 보험왕들은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 많은 고객을 만나기 위해 노력한다. 묵묵히 ‘개척 영업’(모르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모집)을 하면서 성실하게 활동하는 보험왕들이 많다. 하지만 실적 압박이 워낙 커 무리한 영업을 하는 사람도 나온다. 특히 활동 지역에선 연예인에 버금가는 인지도가 있어 맘만 먹으면 ‘사고’를 칠 수 있는 환경이다.
15년간 설계사로 일하면서 10번이나 보험왕에 오른 이모씨(38·여)가 2011년 사기 혐의로 울주경찰서에 구속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여러번 맛본 보험왕의 달콤함에 집착해 허위 보험계약을 만들어 보험료를 자신이 납부했다. 결국 자금이 부족해지자 이씨는 고객의 보험해지환급금 등 1억5000만원을 횡령했다. 또 고객들에게 “신축 원룸에 투자하라”며 2억원가량을 받아 챙겼다. 피해자들은 “보험왕이라기에 믿고 돈을 맡겼다”고 말했다.
보험왕이라는 타이틀은 계산과 눈치가 빠른 상인들도 속아 넘어갈 만한 ‘간판’이다. 설계사 이모씨(47·여)는 “원금을 보장하고 월 6% 이자를 주겠다”며 서울 동대문과 명동 일대 도소매 상인 130명에게서 117억원을 받아 가로챘다. 그는 과시욕과 씀씀이가 커 보험료 중 2억원가량을 회사에 납입하지 않고 개인 용도로 쓴 혐의도 경찰에 적발됐다. 경찰은 “이씨가 5번이나 보험왕에 선정된 데다 10년간 매일 시장에 나타나 신뢰를 쌓아 이 같은 일이 가능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식사시간도 없는 보험왕의 하루
부정적인 면이 부각되고 있지만 사실 보험왕은 누구보다 노력파들이다. 한 대형 손해보험사에서 아홉 차례 보험왕을 차지한 D씨의 지난달 15일 일정을 보면 그들의 바쁜 일상을 알 수 있다.
2500명의 고객을 관리하며 지난해 53억원의 매출을 올린 D씨는 오전 6시30분에 눈을 뜬다. 거울을 보며 “오늘도 잘할 수 있다”는 자기 최면을 건 뒤 과일 등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는다. 보험사가 임대료를 내 주는 사무실로 이동해 개인비서 두 명과 상의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본격 영업은 세 벌의 정장이 걸려 있는 승합차로 경기지역 공단으로 이동하면서 시작된다. 점심시간에 맞춰야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차 안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운다. 이날 방문에서 그는 15명을 만났다.
한숨 돌리기 위해 쪽잠으로 체력을 회복한 뒤 서울의 한 자동차보험 고객을 찾았다. 7년째 계약을 유지하는 고객인데 얼마 전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해 보상 처리 등을 안내하는 자리다. 다음에는 근처 종합병원에 입원한 우수 고객 병문안이다. 서울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문병에 어울리도록 더 어둡고 점잖은 정장으로 갈아입는다.
병원 방문 뒤 몇몇 고객을 더 만나고 귀가한 시간은 오후 11시. 밀린 빨래와 집안 청소 등을 하고 혼자 한참 늦은 저녁을 먹으면 D씨의 하루가 마무리된다. 그는 “이동이 워낙 많아 1년에 구두 10켤레를 바꿔 신고, 자동차 타이어도 매년 교체한다”고 했다.
잘못된 수수료 체계가 비리에 한몫
국내 보험설계사는 약 40만명이다. 보험회사에 소속된 설계사가 23만8000명, 보험대리점 소속으로 일하는 설계사가 16만1000명 정도다. 1억원 이상의 ‘억대 연봉 설계사’는 1만2000명 선이다. 이들 억대 연봉 설계사 중에서도 보험왕이 되는 사람은 회사당 1명이니 25명 정도다.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할 수 있다.
주요 11개 보험사의 올해 보험왕들을 보면 평균 만 52.4세로 한 명을 제외하면 모두 여성이다. 7곳의 보험왕이 3회 이상 수상자다. 매출(수입보험료)은 평균 72억1000만원이다. 여기서 생기는 많은 수입에 대한 유혹이 불법마저 눈감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현행법상 보험가입 대가로 금품을 제공하는 건 불법이다. 하지만 거액의 보험을 유치하기 위해 보험사에서 받은 수수료의 일부를 가입자에게 건네주는 게 우수 설계사들 사이에선 관행처럼 돼 있다. 계약성사를 위해 초반 몇 달치 보험료를 대신 내 주기도 한다. 거액의 보험계약을 옮기겠다는 말에 골프 접대나 해외 여행을 보내주는 일도 잦다.
전문가들은 계약 초반에 수수료를 몰아주는 잘못된 수수료 체계가 부작용을 부추긴다고 말한다. 계약 한 건에 많게는 수천만원의 수수료를 받기 때문에 금품 제공이나 보험료 돌려막기의 유혹에 빠진다는 얘기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수억원짜리 보험계약을 하면 설계사에게 떨어지는 수수료가 수천만원이라 가입자들이 먼저 보험가입 대가를 요구하는 일도 많다”며 “수수료 체계 개편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김은정 기자 ke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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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는 분단위 쪼개 뛰는 '노력파'
실적 압박에 무리한 영업 '유혹'
일부, 허위계약에 보험료 돌려막기도
[ 김은정 기자 ]
서울 동작경찰서는 올초 “고수익을 보장한다”며 수억원을 받아 챙긴 보험설계사 문모씨(42·여)를 구속했다. ‘950만원을 투자하면 한 달 후 2000만원을 받는다’ ‘2000만원을 내면 매달 60만원의 수익이 나온다’는 등의 말로 2002년부터 15명에게서 13억원을 가로챈 혐의였다. 문씨는 한 보험회사에서 우수설계사 상을 11년 수상한 보험왕 출신이었다. 그가 연속 우수설계사로 처음 선정된 시점은 사기행각을 시작한 2002년과 일치했다. 가로챈 돈의 상당 부분이 허위 보험계약을 위한 보험료 돌려막기에 사용됐다.
집착·과시욕…아슬아슬 ‘줄타기’
대부분 보험왕들은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 많은 고객을 만나기 위해 노력한다. 묵묵히 ‘개척 영업’(모르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모집)을 하면서 성실하게 활동하는 보험왕들이 많다. 하지만 실적 압박이 워낙 커 무리한 영업을 하는 사람도 나온다. 특히 활동 지역에선 연예인에 버금가는 인지도가 있어 맘만 먹으면 ‘사고’를 칠 수 있는 환경이다.
15년간 설계사로 일하면서 10번이나 보험왕에 오른 이모씨(38·여)가 2011년 사기 혐의로 울주경찰서에 구속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여러번 맛본 보험왕의 달콤함에 집착해 허위 보험계약을 만들어 보험료를 자신이 납부했다. 결국 자금이 부족해지자 이씨는 고객의 보험해지환급금 등 1억5000만원을 횡령했다. 또 고객들에게 “신축 원룸에 투자하라”며 2억원가량을 받아 챙겼다. 피해자들은 “보험왕이라기에 믿고 돈을 맡겼다”고 말했다.
보험왕이라는 타이틀은 계산과 눈치가 빠른 상인들도 속아 넘어갈 만한 ‘간판’이다. 설계사 이모씨(47·여)는 “원금을 보장하고 월 6% 이자를 주겠다”며 서울 동대문과 명동 일대 도소매 상인 130명에게서 117억원을 받아 가로챘다. 그는 과시욕과 씀씀이가 커 보험료 중 2억원가량을 회사에 납입하지 않고 개인 용도로 쓴 혐의도 경찰에 적발됐다. 경찰은 “이씨가 5번이나 보험왕에 선정된 데다 10년간 매일 시장에 나타나 신뢰를 쌓아 이 같은 일이 가능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식사시간도 없는 보험왕의 하루
부정적인 면이 부각되고 있지만 사실 보험왕은 누구보다 노력파들이다. 한 대형 손해보험사에서 아홉 차례 보험왕을 차지한 D씨의 지난달 15일 일정을 보면 그들의 바쁜 일상을 알 수 있다.
2500명의 고객을 관리하며 지난해 53억원의 매출을 올린 D씨는 오전 6시30분에 눈을 뜬다. 거울을 보며 “오늘도 잘할 수 있다”는 자기 최면을 건 뒤 과일 등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는다. 보험사가 임대료를 내 주는 사무실로 이동해 개인비서 두 명과 상의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본격 영업은 세 벌의 정장이 걸려 있는 승합차로 경기지역 공단으로 이동하면서 시작된다. 점심시간에 맞춰야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차 안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운다. 이날 방문에서 그는 15명을 만났다.
한숨 돌리기 위해 쪽잠으로 체력을 회복한 뒤 서울의 한 자동차보험 고객을 찾았다. 7년째 계약을 유지하는 고객인데 얼마 전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해 보상 처리 등을 안내하는 자리다. 다음에는 근처 종합병원에 입원한 우수 고객 병문안이다. 서울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문병에 어울리도록 더 어둡고 점잖은 정장으로 갈아입는다.
병원 방문 뒤 몇몇 고객을 더 만나고 귀가한 시간은 오후 11시. 밀린 빨래와 집안 청소 등을 하고 혼자 한참 늦은 저녁을 먹으면 D씨의 하루가 마무리된다. 그는 “이동이 워낙 많아 1년에 구두 10켤레를 바꿔 신고, 자동차 타이어도 매년 교체한다”고 했다.
잘못된 수수료 체계가 비리에 한몫
국내 보험설계사는 약 40만명이다. 보험회사에 소속된 설계사가 23만8000명, 보험대리점 소속으로 일하는 설계사가 16만1000명 정도다. 1억원 이상의 ‘억대 연봉 설계사’는 1만2000명 선이다. 이들 억대 연봉 설계사 중에서도 보험왕이 되는 사람은 회사당 1명이니 25명 정도다.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할 수 있다.
주요 11개 보험사의 올해 보험왕들을 보면 평균 만 52.4세로 한 명을 제외하면 모두 여성이다. 7곳의 보험왕이 3회 이상 수상자다. 매출(수입보험료)은 평균 72억1000만원이다. 여기서 생기는 많은 수입에 대한 유혹이 불법마저 눈감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현행법상 보험가입 대가로 금품을 제공하는 건 불법이다. 하지만 거액의 보험을 유치하기 위해 보험사에서 받은 수수료의 일부를 가입자에게 건네주는 게 우수 설계사들 사이에선 관행처럼 돼 있다. 계약성사를 위해 초반 몇 달치 보험료를 대신 내 주기도 한다. 거액의 보험계약을 옮기겠다는 말에 골프 접대나 해외 여행을 보내주는 일도 잦다.
전문가들은 계약 초반에 수수료를 몰아주는 잘못된 수수료 체계가 부작용을 부추긴다고 말한다. 계약 한 건에 많게는 수천만원의 수수료를 받기 때문에 금품 제공이나 보험료 돌려막기의 유혹에 빠진다는 얘기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수억원짜리 보험계약을 하면 설계사에게 떨어지는 수수료가 수천만원이라 가입자들이 먼저 보험가입 대가를 요구하는 일도 많다”며 “수수료 체계 개편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김은정 기자 ke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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