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프랑스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러시아로 국적을 바꿔 ‘세금 망명’ 논란을 빚었다. 앞서 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비통그룹 회장도 벨기에로 국적을 옮기려다 포기했다. 쇼트트랙 안현수 선수는 2년 전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한 뒤 러시아로 귀화했고, 양궁선수 엄혜련과 김하늘은 일본과 호주로 국적을 바꿔 올림픽에 출전했다.
새 국적을 얻으려는 이유는 정치적 신념이나 세금, 국제결혼, 취업, 올림픽 출전 등 다양하다. 글로벌 시대에 국경의 의미가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국적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19세기 이전까지는 국경을 넘을 일이 많지 않아 별로 문제가 없었다. 국적이 거주개념과 본격적으로 분리된 것은 근대국가의 출현 이후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계기로 참정권이 확대되고 국민개병제가 실시되면서 국적법이 강화됐다.
국적 부여 기준은 혈연 중심의 혈통주의(속인주의)와 출생지 중심의 속지주의다. 아시아와 유럽 국가들은 혈통주의, 아메리카 국가들은 속지주의를 기본으로 삼는다. 속지주의는 원정출산뿐만 아니라 불법이민자의 ‘앵커 베이비(anchor baby)’ 문제도 낳는다. 미국에서 태어나 시민권을 얻은 불법이민 자녀가 18세 때 가족의 영주권을 청원해 전 가족을 시민권자로 만드는 ‘닻(anchor)’ 역할을 하는 것이다.
최근엔 미국 국적을 버리는 사람도 늘어나는 추세다. 올 들어서만 2400명에 이른다. 전년보다 33% 증가했는데 대부분 세금 부담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한국 국적을 포기한 사람이 최근 5년간 10만6000여명에 이른다. 이 중 절반이 미국으로 떠났고 다음은 일본 캐나다 호주 순이다. 같은 기간 한국 국적 취득자는 9만여명으로 70%가 중국인이다.
국적을 공공연하게 팔아먹는 나라도 많다. 2004년 유럽연합(EU)에 가입한 지중해의 섬나라 몰타는 65만유로(약 9억3500만원)에 국적을 팔고 있다. 몰타 국민이 되면 EU 28개국 어디라도 정착할 수 있다는 게 마케팅 포인트다. 발칸반도의 소국 몬테네그로는 50만유로(7억원), 카리브해의 세인트 키츠 앤드 네비스는 ‘단돈’ 25만달러(2억7000만원)에 국적을 판다.
경제가 나빠 ‘여권 장사’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딱하긴 하다. 그러나 우리도 그랬다.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한 ‘제주도 부동산 영주권’에 중국인이 너무 몰려 투자 기준을 5억원에서 10억원으로 올리느라 법석인 걸 보면, 사돈 남말 할 때도 아닌 것 같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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