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과객 인편에 중의적삼 부치기

입력 2013-11-21 21:47   수정 2013-11-24 11:24

철없던 낭만소년이 노래로만 37년 세월
한 1년만 볕좋은 곳서 그림 그려봤으면

최백호 < 가수·한국음악발전소장 >



어릴 적 두부 심부름을 많이 다녔다. 우리 어머님, 장손에 외동인 나에게 심부름 시키실 리 없었고 당연히 내 위 둘째누나의 역할이었는데, 그 누님이 지금도 좀 파쇼적이라 그때도 “니(너)!” 하면 서열 3위인 나는 끽소리 없이 찌그러진 양재기 하나 들고 마을에서 떨어진 학교 사택에서 안동네까지 걸어갔다. 가는 길에 지나가는 강아지 ‘오요요요’ 한번 쓰다듬고 놀다가, 워낭소리 딸랑거리는 소는 무서워서 꼬리 피해 멀리 돌아가고, 길섶에 고운 꽃 있으면 냄새도 한번 맡아보고 ‘어무이’ 갖다드릴까 꺾어도 보고, 동네 예쁜 여자 아이 만나면 안 보는 척 뒷모습 끝까지 쳐다보고. 그러고는 불안에 떨던 누나가 체포하러 동네를 헤맬 적에 나는 이미 양재기도, 두부도, 두부 살 돈도 다 잊은 사람이었다.

매를 드신 어머니 앞에 둘다 팔을 높게 올리고 벌을 설 때 누나가 훌쩍거리며 “논둑에 앉아 가지고는예 내가 펄펄 뛰는데 ‘누우야 저어기 산 위에 연 날아가는 거 함 봐라’ 그랍디더” 그랬단다. “양재기는 어쨌는데?” “두부 살 돈은?” 기억이 안 났다. 그냥 구름 구경하다가, 산 구경하다가 구경 구경하다가 그 사이로 머얼리 연 하나 날아가서 구경만 했을 뿐인데. “모르겠는데예.” 찬찬히 아들 눈을 들여다보시던 어머님은 일단 절도 혐의는 없는 걸로 판단하시고는 원인 제공한 딸에게 혀를 차며 말씀하셨다. “과객 인편에 중의적삼 부치지, 동명(내 아명)이한테 그걸 시켰노.” 그때는 그 말씀이 얼마나 모욕적인 것인지 참말로 몰랐다.

‘낭만시대’라는 이름으로 라디오를 진행한 지 벌써 5년이 넘어 3월이면 6년이다. 그동안 방송시간 한번 늦은 적 없고 장기휴가 한번 없이 착실히 해왔다. 본업인 가수 말고는 한 가지 일을 이렇게 오래 꾸준히 하는 건 처음이다. 그런데 나의 이런 착실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가족들은 불안한가보다. 언제 집어던지고 도망을 가버릴지 어느날 또 무슨 사고를 칠지. 아내가 우스개로 “적금 끝날 때까지만 참으라”고 했는데 아내는 계속 새로운 적금을 들고 있는 것 같고.

나이 더 들기 전에 한 1년만이라도 햇빛깔 아름다운 곳에 가서 그림이나 그리며 살아 보는 게 내 소망이다. 여유가 있다면 프랑스 남부쯤이 좋고. 37년 세월 열심히 노래만 불러온 늙은 가수의 꿈 치고는 소박한 것 아닌가. 그러나 오늘도 들썩거리는 엉덩이를 누르며 “안녕하세요 최백호의 낭만시대 가수 최백홉니다~오늘 낭만시대 첫 노래는 최헌의 ‘구름 나그네’.”

최백호 < 가수·한국음악발전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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