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CCTV 간판 아나운서
예능프로 맡아 인기몰이…미국 유학갔다 남편 만나 결혼
뛰어난 미모로 LG전자 모델도
도전…도전…끝없는 M&A
위성방송 인수하며 사업 시작…포털·케이블 TV 등 잇따라 투자
문화재단 세워 사회공헌도 앞장
[ 노경목 기자 ]
2000년대 초반 양란 양광미디어투자그룹 회장은 ‘중국의 오프라 윈프리’로 불렸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자 아나운서이면서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위성TV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별명은 이제 ‘중국의 루퍼트 머독’이라고 바뀌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2000년 창업한 양광미디어투자그룹이 9개국 60여개 매체를 거느린 미디어제국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3개 신문, 10개 TV채널, 3개 인터넷 포털, 31종의 잡지가 양란의 휘하에 있다. 이 과정에서 양란의 재산은 70억위안(약 1조2200억원)까지 불어났다.
양란은 2003년부터 중국 최고 권력기관인 전국인민대표대회의 대의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뛰어난 미모를 갖춘 덕에 2007년에는 LG전자 LCD TV의 중국 모델로 기용됐다. 아름다움과 직업적 성취는 물론 부와 명예까지 거머쥐었지만 그의 나이는 이제 45세. 그의 도전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세계 미디어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인기 아나운서에서 사업가로
1968년 베이징에서 태어난 양란의 집안은 비교적 평범했다. 아버지는 대학교수였지만 물려받을 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베이징외국어대 영어학과에 진학해서는 당시 많은 젊은이처럼 막연히 미국 금융가에서 일할 수 있기를 꿈꿨다. 하지만 1990년 10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중국 국영방송국인 CCTV 아나운서가 되면서 양란의 인생은 바뀌기 시작한다.
입사와 동시에 자질을 인정받아 당시 CCTV 간판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정다중이(正大綜藝)’를 진행하게 된 그는 최고 아나운서에게 수여되는 ‘골드마이크’를 입사 5년차에 받았다. 아울러 중국 본토는 물론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 중화권 시청자들로부터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아나운서로 실력을 한창 인정받던 그는 1994년 사표를 내고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대에서 국제언론학을 공부하기 위해 홀로 유학을 떠났다. 대학원 재학 중이던 1996년 동료와 함께 제작한 ‘2000년 한때’라는 다큐멘터리는 컬럼비아방송을 통해 오후 7시 황금 시간대에 미국 전역에 송출됐다. ‘미국 주류 매체에 진출한 최초의 중국인’이라는 영예가 따라다니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1997년 컬럼비아대 이사에 뽑히는 등 미국에서도 탄탄한 기반을 닦았다. 미국 유학에서 양란은 평생의 반려자인 우정을 만났다. 홍콩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 미국 등에서 교육을 받은 우정은 양란이 미디어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데 물질적 버팀목을 제공해줬다.
○공격적 M&A로 덩치 키워
양란은 우정과 결혼한 이듬해인 1997년 다시 미국에서 이룬 모든 것을 뒤로하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홍콩의 위성방송인 펑황TV에 둥지를 튼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붙인 시사 프로그램 ‘양란 스튜디오’를 진행하며 4년간의 공백을 무색하게 하는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방송계의 인기에 만족하고 있을 그가 아니었다. 2000년 남편의 도움을 받아 홍콩증권시장에 상장해 있던 위성방송사인 량지를 3500만위안에 인수하며 미디어산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양란 부부는 2004년까지 당시 중국 최대 포털인 시나닷컴을 비롯해 11개 회사를 인수하거나 지분에 투자한다.
자금이 넉넉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차입규모가 컸다. 이에 따라 양광그룹은 자산이 83% 증가하는 동안 부채가 280% 늘며 일시적으로 유동성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2003년 순손실이 2억홍콩달러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성장하는 중화권 미디어 시장과 양란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회사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양란은 2001년부터 양광위성TV를 통해 ‘양란방담록’이라는 인터뷰 성격의 토크쇼를 진행했다. 조지 소로스 퀀텀펀드 회장,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등 세계 유명인사 450여명과 대담하며 신생매체인 양광TV의 인기와 브랜드 가치를 크게 끌어올렸다.
중국과 홍콩을 중심으로 한 미디어산업 투자에 자신이 붙자 2004년 9월에는 싱가포르의 케이블TV회사를 사들이며 해외로 진출했다. 올해 7월에는 독일 최대 미디어그룹인 베텔스만의 토마스 미델호프 전 최고경영자(CEO)와 함께 글로벌 미디어 투자회사를 설립해 눈길을 끌었다. 10억~20억달러의 자금력을 바탕으로 예능 프로그램을 전문으로 하는 글로벌 제작회사를 인수한다는 목표다.
○‘모든 것 내려놓는 도전’이 성공비결
양란의 인생에서는 특별한 좌절이나 부침을 찾기 어렵다. 아나운서로서의 성공과 부자 남편과의 결혼도 타고난 미모와 언변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지금 시점에서 돌아보니 쉽게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선택을 하고 도전하는 순간에는 쉽지 않은 일들이었다. 촉망받는 CCTV 아나운서의 역할을 내려놓고 미국으로 갈 때나 사업을 시작할 때, 나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매번 새로운 것을 선택하고 성과를 쌓아가는 과정은 힘들었다.”
여성 사업가로서의 어려움도 있었다. 처음 회사 경영을 시작한 2000년 양란은 첫 아이를 임신했다. 입덧이 심해 회의를 하다 화장실로 뛰쳐나가기를 수차례 반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입을 헹구고 껌을 씹으며 구취를 없앤 뒤 이내 회의에 복귀하곤 했다.
양란은 사회공헌사업에도 힘쓰고 있다. 2006년 남편과 함께 그해 양광그룹 수익의 51%를 기부해 세운 양광문화재단이 대표적이다. 양광은 매년 재단에 2억~3억위안을 출연하며 교육과 빈곤 퇴치 사업에 힘쓰고 있다. 그는 “방송을 진행하다 병든 남편과 장애인 시아버지, 어린 딸을 돌보며 고된 삶을 살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난 적이 있다”며 “딸은 다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가진 것을 사회에 더 많이 환원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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