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상사 여행] “시장, 스스로 질서 못만들어 통제 필요”…정부 개입 강조

입력 2013-11-29 17:03  

(45) 제3의 길 선구자 칼 폴라니


시장자유주의는 19세기 서구사회를 지배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하는 다양한 형태의 집단주의에 자리를 내주고 밀려났다. 자유와 책임, 작은 정부를 신봉하는 지식인들에겐 ‘절망의 시기’였다.

대공황 빈곤 실업 나치즘 등 20세기 초 유럽의 위기는 사회 통제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시장자유주의 때문이라고 진단하면서 인류가 번영을 누리기 위해선 경제를 민주적으로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 오스트리아 출신 사회경제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이다.


아버지가 철도사업가였던 헝가리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폴라니가 일생 다룬 문제는 경제와 사회의 관계였다. 이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번영이 지속가능한 경제 질서를 모색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경제학을 넘어 고고학 인류학 등 광범위한 지식 탐구에 몰두했던 폴라니가 주목한 것은 과거부터 이어져온 사람들의 먹고사는 방식이었다. 그가 발견한 건 세 가지다. 하나가 호혜 원리다. 남을 도와주는 이타적인 행동이다. 원시사회에서 가족이나 친지 간에 볼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경제를 제도화하는 두 번째 원리는 재분배인데, 이는 통치자가 계획을 통해 한 집단 안에서 전체 자원을 재분배하고 사람들이 골고루 먹고살게 하는 방식이다. 고대사회와 봉건사회 삶의 행태가 바로 그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원리는 교환이다. 시장가격에 의해 이윤추구 행동이 조정되는 경제시스템이다. 이런 경제가 등장한 시기는 19세기라는 게 폴라니의 설명이다.

따라서 시장교환은 경제 제도화의 유일한 원리가 아니라 다수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폴라니는 주장한다. 호혜와 재분배의 비(非)시장 경제를 무시하고 시장교환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건 잘못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시장교환은 역사적으로 특정 기간에 나타난 현상이기에 보편적인 현상도 아니라고 한다.
흥미로운 건 비시장적 경제가 인간 본성에 적합하고 도덕적이라는 폴라니의 해석이다. 본래 인간은 이윤추구보다 공동체를 더 생각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런 낭만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폴라니는 비시장적 경제는 공동체 사회의 윤리?문화?정치적 영향에 예속돼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경제야말로 구성원들의 공생·공영의 가치를 높인다고 치켜세운다.

그는 시장교환이 시장 바깥에 있는 문화 및 윤리 요소 등 사회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자유시장이 사회의 통제에서 벗어남으로써 전통 관행이 파괴되고 빈곤과 실업이 야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사회는 인간의 공동체적 본능에 맞지도 않고 그래서 시장 사회는 문명의 후퇴라고 혹평한다.

그런 역효과는 19세기 자유주의 시대가 입증하고 있다는 게 폴라니의 주장이다. 곡물법 폐지를 비롯한 규제 철폐를 통해 노동?토지 등 다양한 시장을 자유화했기 때문에 19세기 경제는 산업혁명과 같은 거대한 전환을 맞게 됐다는 얘기다. 가격 중심의 시장교환으로 전통 관행에 따른 농촌경제 신분사회의 비시장적 경제는 파괴돼 빈곤이 만연했고 사회불안도 심해졌다는 게 그의 역사해석이다.

폴라니는 시장사회의 그 같은 부정적 영향을 막기 위해 노조나 지주집단이 저항운동을 벌였다고 설명한다. 또 정치권은 보호정책 규제입법으로 시장의 ‘질주’를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의 간섭주의와 사회주의 파시즘, 심지어 세계 대공황도 ‘고삐 풀린’ 시장의 질주에 대한 저항의 산물이라고 폴라니는 지적한다. 보호주의 성격의 반작용과 각종 입법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시장경제체제는 인간사회를 파멸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인식이다

그래서 폴라니는 시장사회 대안으로 ‘민주적으로 통제된 경제’를 제안하면서 그의 사상의 결론을 맺는다. 그의 대안사회는 시장자유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니다. 그는 자유의 억압이라는 이유로 사회주의를 반대한다. 폴라니가 제안한 이 체제가 바로 ‘제3의 길’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 대한 비판도 없지 않다. 먼저 민주적 통제도 자유를 유린하는 폭정의 위험성이 내재돼 있다는 사실이다. 또 주목할 것은 19세기 시장자유주의가 빈곤과 실업, 삶의 불안을 불러왔다는 폴라니의 진단이다. 이는 근거가 약하다는 게 역사가들의 인식이다. 실업은 농촌의 과잉인구 탓이지 산업혁명에서 생겨난 게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그런 노동력을 흡수할 일자리를 창출한 것, 기근을 없앤 게 산업혁명이었다는 것이다.

경제행동은 종교·도덕·문화적 요인 등 사회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폴라니의 인식은 단편적이라는 지적도 받는다. 경제와 사회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시장자유주의가 사회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시장경제가 유지되기 위해선 이에 적합한 도덕 법 문화 사고방식 등이 전제돼야 한다는 점에서다. 이런 비판에도 경제학 인류학 등 학제를 융합해 시장경제의 대안사회를 찾아나선 폴라니의 공로는 높이 평가받고 있다.

민경국 교수

20C초 사회주의 확산에 영향…시민사회론 형성 기여

플라니 사상의 힘

폴라니의 유명한 저서《거대한 전환》은 1944년 발간됐는데 흥미롭게도 같은 해에 하이에크의 유명한 저서 《노예의 길》도 출간됐다. 두 석학은 직접 인용하거나 논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상 논쟁을 예상해 보면 흥미로운 점이 많다.

폴라니가 “20세기 유럽 위기, 그 주범이 19세기 자유주의 때문이지요”라고 말했다면 하이에크는 눈을 찌푸리며 이렇게 답했을 터이다. “쓸데없는 소리! 그 위기는 폴라니 당신 같은 사람이 주장한 다양한 개입주의 때문이오.”

폴라니는 상기된 얼굴로 이렇게 응수했을 것이다. “자유주의가 문제가 없다면 왜 노동운동 사회주의 간섭주의 등의 입법이 등장했겠소!” 이에 하이에크가 하는 말, “그런 운동이 등장한 건 당신들이 현실을 왜곡한 탓이오. 자유주의는 19세기 전대미문의 발전을 불러 왔소. 자유주의를 곡해하지 마시오. 자유시장이야말로 문명의 길이라는 걸 직시해야 하오.”

폴라니가 말하는 비(非)시장적 경제의 도덕적 기초는 석기시대에 생겨난 소규모 사회의 도덕인 연대감이다. 산업혁명 이전의 모든 세계는 그런 가치를 기반으로 한 ‘원시 세계’였다. 그런데 신분제도 부족사회 중상주의 등 비시장적 경제는 개인들에게 안정적 삶을 제공했다는 이유에서 폴라니는 그런 경제에 대해 우호적이다.

그러나 당시 기근과 전염병이 만연해 삶이 매우 불안정했다는 게 역사가들의 증언이다. 규제가 풀리면서 생산이 왕성했던 산업혁명 이후에나 비로소 경제적 안정을 말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폴라니의 사상은 20세기에 시장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지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사회주의가 지구촌에 번져가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론, 비정부 조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시민사회론, 공동체 정신을 중시하는 공동체주의도 폴라니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에 대한 좌파들의 설명도 고삐 풀린 시장의 질주라는 개념을 제시한 폴라니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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