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자생적 질서 옹호한 ‘법치’
의회권한 강화로 원래 의미 왜곡
입법제한 통해 자유정신 살려야
법의 내용이 무엇이든 의회가 정한 법에 따라 국가가 권력을 행사하는 것, 헌법에 합치되는 법을 집행하는 것, 이런 게 법치(法治)라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짙게 깔려 있다. 국민의 뜻에 따른 민주적 입법이 법치라고 주장한다. 분배 복지를 위한 정치, 중소기업을 위한 대기업 규제야말로 진정한 법치라고 큰소리치기도 한다.
이쯤에서 보면 유서 깊은 법치가 시장에 대한 정부간섭을 정당화하는 얼빠진 개념으로 전락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가격·노임·금리 규제, 기업·금융·노동규제 등 매년 수천건의 규제가 ‘법’이라는 가면을 쓰고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이유도 법치에 대한 왜곡된 인식 때문이다. 이로부터 법치를 해방시키는 게 급선무가 아닐 수 없다.
우선, 주지할 점은 법치란 자유주의의 전통 속에서 정립된 정치적 이상이라는, 그래서 자유주의 맥락에서만 그 개념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는 게 애덤 스미스가 법치의 원조라는 사실이다.
그는 18세기 개인의 자유와 번영을 해치는 중상주의의 압제를 배격하기 위해 법치에 호소했다. 칸트가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 대해야 한다는 도덕철학적 의미를 법학적으로 해석해 법치를 개발했던 것도 집단목표를 위해 독일시민의 경제자유를 억압하던 정부 관료와 싸우기 위해서였다. 19세기 후반 영국의 법 철학자 다이시가 법치에 호소한 것도 사회정책을 위한 입법부의 자의적 권력행사로 야기되는 사회 분열의 우려 때문이었다. 계획경제의 다양한 정부간섭으로 암울했던 20세기에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하이에크가 “법치의 이탈은 노예의 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목할 것은 그같이 정치적으로 어려운 고비마다 자유주의 거장들이 의지했던 법치의 진수(眞髓)다. 이는 통치자가 멋대로 법을 정하지 못하도록 법이 갖춰야 할 조건이다. 핵심은 첫째, 법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 산업 등을 차별하는 건 법이 아니라는 뜻이다. 둘째, 법은 불의(不義)의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따라서 법은 집단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마지막 세 번째, 법은 금지된 행동이 무엇인지를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확실해야 한다. 일감몰아주기 금지는 정상·위장거래를 구분할 기준이 없기에 불확실하다. 이런 ‘법치의 법’으로 구성된 법질서는 개인과 기업이 스스로 정한 목적을 자유로이 추구할 수 있는 ‘자유의 틀’이다. 법치는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가능하게 해 자유와 번영을 이끄는 제도적 환경이라는 것도 직시해야 한다.
흥미로운 건 자유의 수호자인 법치를 왜곡한 원인이다. 민주이념의 등장으로 국민의 뜻이 무엇이든 그게 법이라는 인식이 형성됐고 그래서 국민의 대표기관에 경제입법권을 무제한 허용했다. 입법을 제한하는 법치가 실종된 것이다. 애석하게도 헌법도 스스로 법치를 위반하고 있기에 입법제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용-편익, 공익, 공정 등을 통한 법 인식도 의회의 입법 홍수를 막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법치의 왜곡을 야기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 기여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게 시장의 자생적 질서에 관해 관심도 없고, 경험도 없는 공법학 후생경제학 케인스주의였다.
유감스럽게도 법치 실종의 결과는 빈곤, 실업, 저성장 위기 등 참혹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도 법 같지도 않은 규제입법, 금리의 인위적 조작, 중앙은행의 재량적 통화정책 등 법치의 위반 때문이었다. 한국 경제의 성장잠재력이 지속적으로 축소되는 근본적 이유도 노동, 금융, 기업 등 모든 부문에서 법치가 실종됐기 때문이라는 걸 직시할 필요가 있다.
지금이야말로 의회의 입법권을 엄격히 제한해 국가의 자의적 강제로부터 개인과 기업의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법과 법치의 정신을 살려야 할 절박한 때다. ☞한국경제신문 11월 22일자 A38면
민경국 강원대 교수·경제학·한국제도경제학회장 kwum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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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멀쩡한 식품을 쓰레기 만드는 유통기한 규제
유통기한을 이유로 식품 제조업체들이 어쩔 수 없이 회수해 폐기하는 제품이 연간 6000억원 규모나 된다는 한경 보도는 주목할 만하다. 가정에서 버리는 식품까지 포함하면 1조원이 넘는다고 한다. 자원낭비는 물론 소비자 부담도 늘어난다. 물론 판매시한을 의미하는 유통기한과 먹을 수 있는 기한, 즉 소비기한은 전혀 다르다.
실제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정하는 유통기한은 먹을 수 있는 기한을 뜻하는 소비기한에 비해 너무 짧다. 식용유는 5년까지 먹을 수 있지만 유통기한은 2년이고, 소비기한이 8개월인 라면은 유통기한이 5개월이다. 소비기한이 각각 90일과 45일인 두부와 우유는 유통기한이 고작 14일이다. 식약처는 냉장보관을 하지 않고, 개봉해서 바로 먹지 않고 놔두는 경우까지 고려해 유통기한을 정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냉장보관하면 언제까지 먹어도 된다는 표시를 따로 하지 않는 이상, 소비자들은 소비기한이 유통기한보다 훨씬 길다는 것을 알 도리가 없다. 유통기한이 지나면 상해서 못 먹는다고 생각하는 소비자가 56%나 된다는 여론조사가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식품업체들이 유통기한이 임박했거나 지난 제품을 영·유아원 양로원 등에 무상 기부하는 것을 두고 못 먹는 식품을 아이와 노인들에게 먹인다고 공격하는 일부 빗나간 공세가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는 소비자 보호를 위해 유통기한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런 규제가 오히려 식품에 대한 불신과 공포감을 키운다. 판매기한을 시행하는 나라는 한국과 미국뿐이다.
게다가 한국은 판매기한 위반에 대해 정부가 영업정지 또는 징역형까지 내릴 수 있게 징벌하는 유일한 국가다. 정부는 그나마 일부 제품에 대해 소비기한을 병기토록 했던 조치도 올 3월 폐지해버렸다.
여기에 공정거래위원회는 최근 유통기한이 절반 이상 지난 우유 등을 제조업체가 대리점에 강제 공급하지 못하게 막는 모범거래기준까지 만들었다.새로운 법규 위반 업체들이 줄줄이 나오게 생겼다. 지나친 규제는 범법자를 만들어 낼 뿐이다. ☞한국경제신문 11월 25일자 A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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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칼럼] 섬의 탄생
50년 전인 1963년 아이슬란드 남쪽 앞바다에서 새로운 화산섬이 탄생했다. 이 섬은 4일 만에 폭 600m, 높이 60m로 성장했고 5년 뒤엔 40여종의 곤충과 새들이 날아다니는 섬으로 발전했다. 사람들은 쉬르트세이 섬이라고 불렀다. 이는 아이슬란드어로 ‘불의 신’ ‘검은 산’이라는 뜻이다. 근래에 드문 대규모 해저분화인 데다 새 화산섬 탄생 과정을 정밀 조사할 수 있어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다.
섬은 이처럼 대규모 화산 활동이나 지진 등의 지각변동으로 태어난다. 동서 500㎞, 남북 300㎞의 거대한 아이슬란드도 화산 폭발로 생겼다. 주기적인 지각변동 때문에 지금도 면적이 늘어나는 중이다. 여덟 개의 큰 섬과 124개의 작은 섬으로 이뤄진 하와이 역시 대륙으로부터 4000㎞ 떨어진 태평양 중심에서 화산 폭발로 생겨났다. 킬라우에아산과 마우나로아산은 요즘도 2~3년마다 폭발하고 있다.
화산섬은 해저 화산의 분출물이 삽시간에 쌓인 것이어서 비교적 키가 큰 편이다. 울릉도는 성인봉의 높이가 983m이고 해저 깊이가 약 2000m나 되기에 전체 키는 3000m에 이른다. 독도 역시 해저에서 보면 높이 2000m가 넘는 거대한 산이다. 연대순으로는 독도가 약 450만~250만년 전에 탄생했으니 울릉도(약 250만~1만년 전), 제주도(약 200만~1만년 전)보다 맏형인 셈이다.
바다 생물인 산호초에 의해 섬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지구에 산호초가 나타난 것은 4억5000만년 전이므로 대략 4억년 전부터 산호섬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산호는 아주 느리게 성장하기 때문에 축구공만한 산호초로 성장하려면 20년이나 걸린다고 한다.
엊그제 태평양의 해저 화산 폭발로 일본 오가사와라 제도 니시노시마 앞 500m 지점에 길이 400m의 미니섬이 탄생했다. 그러자 일본 관방장관이 “제대로 되면 우리 영해 경계선이 그만큼 넓어진다”며 환호했다. 잘못하면 해양 영토 싸움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일본 정부가 조만간 발표할 방위계획의 골자도 섬 지역 방위력 확대와 탄도미사일 대응력 강화다. 소규모 호위함 8대를 추가하려는 것 또한 ‘외딴섬 작전’의 순발력을 높이려는 복안이라고 한다. 이쯤 되면 27년 전 오가사와라 남쪽에 솟았던 섬이 파도에 침식돼 49일 만에 사라져버린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긴 일본도처럼 태평양 바다로 깊숙이 내려진 일본의 섬들이다. 이야기가 조금 복잡해진다.
☞한국경제신문 11월 23일자 A31면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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