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붉은 여왕'의 손을 잡고 달리다가

입력 2013-11-29 21:36   수정 2013-11-30 09:20

"제자리에 남아 있기 위해서라도
죽어라 달려야 하는 메마른 현실
잠시 멈춰 자신만의 여정 짜보길"

김다은 < 추계예술대 교수 daeun@chugye.ac.kr >



영국작가 루이스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속편으로 ‘거울나라의 앨리스’가 있다. 이상한 나라에 갔다 온 앨리스가 거울 속으로 다시 빨려들어가 새로운 모험을 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글자도 물건도 반대방향으로 보이는 거울나라에서, 앨리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붉은 여왕’의 손을 잡고 미친 듯이 달렸지만 주변의 경치가 전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유를 묻자, 붉은 여왕은 이렇게 대답한다. “제자리에 남아 있기 위해서라도 죽어라 달려야하는 거야.”

붉은 여왕의 경고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삶에 고스란히 적용될 때가 많다. 새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사도, 신기술과 파워에 밀려 금방 구식 사양이 되어버린다. 컴맹에서 벗어나 이메일과 인터넷을 제대로 사용하게 되자,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페이스 북, 카카오톡 등 새로운 속도나 커뮤니티의 시스템이 계속 등장한다. 지식과 정보도 무한정 쏟아지고 뭔가 계속 따라잡아야 한다. 따라잡았다 싶으면 그냥 그대로 제자리이다. 미국 시카고대학의 진화학자 밴 베일른은 죽어라 달려도 제자리일 뿐인 이 현상을 ‘붉은 여왕 효과(Red Queen Effect)’라고 칭했다. 어떤 대상이 변해도 주변 환경이나 경쟁 대상이 더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뒤처지게 되는 원리이다.

그런데 붉은 여왕의 손을 한순간 놓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점점 뒤로 밀려, 세상의 어느 구석에 사정없이 처박히거나 적자생존의 결투장에서 힘겨운 마지막 숨을 내쉬게 될까. 무엇보다 제대로 손을 놓을 수는 있을까. 예를 들어, 매일 사용하던 빠른 이메일 대신에 정성스레 손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거나, 자동차나 전철 대신에 두 다리로 바퀴를 돌리는 자전거로 출근하거나, 부동산과 주식 등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된 눈을 조용히 감고, 본래 내 꿈이 무엇이었는지 한번쯤 되돌아볼 수 있을까.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1000원짜리 식당’을 운영하며 배고픈 이들의 몸과 마음을 채워주던 한 할머니의 삶처럼, 주변의 어려운 이들을 위해 자신의 노동이나 돈을 아끼지 않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속도는 어떻게 다른지 눈여겨볼 수 있을까.

앨리스는 여왕의 손을 놓고 체스판 위의 말인 졸(卒)이 된다. 앨리스는 체스판 위에서 한 칸 한 칸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번에는 속도를 따라잡기 위한 전진이 아니다. 사자와 유니콘 그리고 하얀 기사 등 수많은 난관과 패러독스가 계속되는 여정이다. 게다가 거울의 시공간은 역전과 비논리가 지배하는 곳이어서, 결과가 사건보다 먼저 일어나기도 하고 원하는 곳에 도착하기 위해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도 한다. 체스판 위에서 가장 약한 졸로서 다른 주변의 강한 존재들과 경기를 벌이지만, 앨리스는 농담과 유머 그리고 수수께끼가 뒤섞인 꿈과 환상적인 모험을 즐긴다. 속도의 싸움을 벌이면 왕보다 더 강력한 존재인 붉은 여왕을 결코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꿈의 여행을 계속하던 졸 앨리스는 드디어 여왕으로 등극한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권력의 여왕이 아니다. 자신의 속도와 능력으로 주체적인 여정을 계속한 꿈의 여왕이 된 것이다. 앨리스는 붉은 여왕을 쥐고 흔들다가 꿈에서 깨어나는데, 붉은 여왕의 존재가 현실에서 한낱 보잘 것 없는 고양이였음을 깨닫게 된다.

꿈을 꿨나, 왜 뜬금없이 오래 전 읽었던 동화 속의 붉은 여왕을 들먹이게 된 것일까. 어쩌면 창밖의 남은 잎사귀들이 기꺼이 나뭇가지의 손을 놓고 땅위에 스러져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11월의 마지막 날이 아닌가.

김다은 < 추계예술대 교수 daeun@chugye.ac.k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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