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화 "쉼없이 달려온 노래·연기 인생…고집부리면 설 자리 없더군요"

입력 2013-12-05 21:23   수정 2013-12-06 05:17

아듀 2013 - '벽을 뚫는 남자' 열연…'뮤지컬계 전설' 이정화
묵직한 톤으로 창법 바꿔…2014년 '셜록홈즈 2' 등 출연



[ 송태형 기자 ] “공연 직전에 작품과 다른 출연 배우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꼭 기도를 드리죠.”

순간 귀를 의심했다. 무대 경험이 적은 신인이나 초보 배우가 아닌 ‘한국 뮤지컬계 레전드’로 불리는 배우 이정화(49)가 이런 얘기를 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는 서울예대 재학 시절인 1985년 남경읍·경주 형제에 이끌려 뮤지컬 ‘철부지들’에 출연한 이후 28년간 줄곧 뮤지컬 무대에 섰다. 출연작만 100편 가까이 된다.

“새로운 역할을 맡을 때마다 늘 배웁니다. 역할에 가장 비슷한 ‘이정화’다운 면을 찾아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지만 아직도 부족합니다. 연기와 노래는 정말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할 것 같아요.”

“한눈팔지 못할 만큼 계속 나를 찾아주는 분들이 있어서 무대에 설 수 있었다”는 그의 뮤지컬 인생에도 위기는 있었다. 데뷔 이후 언제나 ‘타이틀 롤’만 맡다가 나이가 들면서 주연에서 밀려났을 때다.

“욕심을 버려야 하는 나이가 됐을 때 힘들었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해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하지만 고집부리면 설 무대가 없겠더라고요. 뮤지컬을 사랑하고 계속 무대에 서고 싶은 열망이 제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게 했죠.”

올해 출연한 ‘레베카’ ‘엘리자베스’ 등에서 주연이 아닌 조연이지만 그의 무대 장악력과 카리스마는 여전했다.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프랑스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에서 그의 존재감은 더욱 빛난다. 거리 야채장수와 늙은 매춘부의 1인 2역에 코러스까지 이끌면서 극의 중심을 잡아준다.

“음악이 좋아서 선택했어요. 브로드웨이 작품들과는 스타일이 달라서 관심을 가졌고요. 요즘이야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지만 새롭고 도전의식이 생기는 음악이거나 제가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는 작품들을 고릅니다.”

‘젊은 시절 이정화’만을 기억하는 팬이라면 요즘 그의 노래에 어리둥절할 수도 있다. 1996년작 ‘애랑과 배비장’에서 애랑 역으로 뭇 남성의 애간장을 녹이던 농염한 목소리, ‘알라딘’ ‘아나스타샤’ ‘신데렐라’ ‘피터팬’ 등 애니메이션 한국어 더빙의 여주인공 노래를 도맡아 하던 맑고 고운 미성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서다.

“나이 많은 역할을 하는데 예전처럼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내면 ‘쟤 뭐야’ 하실 거예요. 저음의 묵직한 톤으로 세게 부르는 창법과 발성으로 바꿨어요. 많은 노력을 했어요. 예전 창법으로는 집에 혼자 있을 때만 가끔 불러요.”

그는 ‘벽을 뚫는 남자’에 이어 내년 상반기 ‘셜록홈즈 2’ ‘레베카’ 등에 출연한다. 공연 일정이 거의 쉼 없이 잡혀 있다. 그와 비슷한 연배에서 이만큼 왕성하게 활동하는 뮤지컬 배우는 찾기 힘들다. 그의 꿈은 다른 장르에 비해 ‘배우 나이’가 짧은 뮤지컬 무대에서 오래오래 공연하는 것이다.

“조금만 늦게 태어났다면 그토록 하고 싶었던 ‘미스 사이공’의 킴 역이나 ‘레 미제라블’의 에포닌 역을 할 수 있었을 텐데요. 그 작품들이 한국에 너무 늦게 들어 왔어요. 그래도 여전히 제 연배에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작품과 배역이 많아요.”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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