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고마버라

입력 2013-12-05 21:29   수정 2013-12-06 05:20

남의 잘된 일에 "축하한다" 대신 "고맙다"
할머니의 그 말씀 이제서야 무슨 말인지…

최백호 < 가수·한국음악발전소장 >



내가 어렸을 적에 돌아가신 친할머니는 나의 희미한 기억 속에서나 누님들의 증언을 통해서나 중국의 덩샤오핑 선생을 많이 닮으셨다. 둥근 얼굴에 낮은 코, 눈꼬리는 아래로 처졌으며 큰 눈도 아니셨는데, 지금 천당에서-독실한 가톨릭 신자셨으니-“이눔의 장손이란 놈이 남자를, 그것도 중국남자를 나에게…”하고 화를 내실지 모르지만 할머니를 떠올릴 땐 그냥 그 덩샤오핑 선생 얼굴을 생각했다. 닷새마다 장이 서는 장터거리에 사셨는데 스물아홉 큰아들 하루아침에 보내고, 예순도 안 되신 분이 더러 정신을 놓으시기도 하고 말씀도 느릿느릿 힘들어하시다가 결국 세상 버리셨다.

그런 어른이 장날이면 이른 시간부터 김칫독도 들여다보고 놋수저도 있는 대로 다 내어 놓고 큰솥에 물도 펄펄 끓이셨다 한다. 1950년대 모두가 어렵게 살던 시절이라 시골장에 오는 부인네들은 몇 십리 길을 걸어서 왔고 점심이래야 기껏 보리밥 한 덩어리 보자기에 둘둘 말아 오는 정도였는데 정오쯤 되면 할머니는 그분들 오시라 해서 대청마루 여기저기에 김치 그득 담은 그릇들 펼쳐놓고 펄펄 끓인 맹물에 수저 담그시고 들뜬 목소리로 “자, 백미탕이다. 찬밥들 말아 드시게나” 하셨단다. 한바탕 따뜻한 물에 밥 말고 김치 찢어 배불린 부인네들이 마루에 퍼질러 앉아 “무슨 때기(댁)는 딸 시집 보낸답니더” “누구 집은 살림이 폈심더, 논 샀다 캅디더” 이 마을 저 동네 소식들 시끌벅적 떠들어대면 할머니는 마루 귀퉁이에 걸치고 앉으셔서 고개를 끄떡이기도 하고 간혹 소리 내어 웃기도 하시며 “아이구, 고마버라! 저리 고마블수가 있나” 하시는가 하면 당사자가 그 자리에 있는 경우에는 손까지 덥석 잡으시고는 “내가 이리 고마블수가 없네” 하시며 주(主)객(客)을 바꾸기까지 하셨다 한다. 그러면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헛똑똑이 우리 누님이 가만히 있질 못하고 “할무이는예, 와 남의 좋은 일에 ‘축하한다’ 그래 안하시고 ‘고마버라’ 그라십니꺼? 그럴 때는 ‘축하한다’ 해야 맞습니더” 하면 그때 우리 할머니 한참을 손녀 얼굴 들여다보시다가 “그거는… 고마븐기다.”

명절 때마다,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이 이야기의 의미를, 이제야, 이 나이에야 깨우친다. 우리 할머니처럼 살기는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최백호 < 가수·한국음악발전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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