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핑크 슬립

입력 2013-12-05 21:36   수정 2013-12-06 05:28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인사철이다. 임원이 돼 별을 다는 사람도 있고 정든 회사를 떠나야 하는 사람도 있다. 승진 축하 인사야 서로가 즐겁다. 그러나 퇴직 위로와 격려의 과정은 곤혹스럽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화로 해임을 알리는 경우가 많지만, 외국 기업에서는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 핑크 슬립(pink slip·분홍색 해고통지서) 등으로 통보한다.

핑크 슬립은 미국 자동차회사 포드에서 유래했다. 컨베이어벨트 방식으로 자동차를 대량 생산하는 과정에서 한 명이라도 차질이 생기면 전 공정이 느려지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날마다 업무평가를 받아야 했다. 이 때 평가결과를 흰 종이에 받으면 ‘통과’, 분홍색 종이에 받으면 ‘해고’였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근로계약서를 쓸 때부터 해고예고를 약속하지 않는 한 언제든지 직원을 자를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핑크 슬립을 두려워한다. 주마다 법이 다르긴 하지만, 최소 30일 전에 통지해야 하는 우리나라와는 딴판이다. 물론 직장에서 잘렸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해고통지서를 받은 사람들이 모여 격려하고 일자리 정보를 구하는 행사가 곧 ‘핑크 슬립 파티’다. 불경기 때마다 월가에서 유행했는데, 2000년대 닷컴 붕괴 때는 유럽까지 확산됐다고 한다.

경제 쪽에는 핑크 슬립 말고도 색깔을 활용한 용어가 유난히 많다. 사무직인 화이트칼라와 생산직인 블루칼라 외에 그 중간인 그레이칼라, 지식노동자를 뜻하는 골든칼라라는 말도 생겼다. 간단한 점심식사를 곁들인 토론모임은 브라운백 미팅이라 불린다. 샌드위치 봉투가 갈색이어서 그렇다.

미국 최대 쇼핑 시즌을 알리는 블랙프라이데이는 적자 대신 흑자를 기록하는 날이라는 데서 연유했다. 같은 블랙이라도 1987년 미국 주가가 22.6%나 폭락했던 블랙먼데이(암흑의 월요일)에서는 정반대 의미로 쓰였다.

백서가 정부의 흰색 보고서, 청서가 의회의 조사보고서인 건 잘 알려진 얘기다. 그러고 보면 국내외 경제동향보고서는 그린북, 미 중앙은행(Fed)의 정기 보고서는 베이지북, 컴퓨터 보안 평가지침서는 오렌지북이다. 지나친 제약과 경직된 절차를 레드 테이프라고 하는 걸 보면 붉은색은 역시 좋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해임 통보를 받고 눈앞이 캄캄했던 사람도 너무 어두운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다. 거꾸로 생각하면 흰 도화지 위에 새로운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두 번째 시작’을 남보다 빨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블랙보다 화이트가 더 어울리는 게 새 출발의 색깔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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