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한신 기자 ]
인간은 탄생했을 때부터 악명 높은 동물이었다. 한가로이 채집과 사냥을 즐기는 원시인의 모습은 만들어진 이미지일 뿐이다. 원시인들은 식량과 집, 사냥터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살육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벽을 쌓았다. 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돌무더기를 쌓아올린 것이다. 어쩌면 벽은 인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연적 구조물인지도 모른다.
프랑스 역사학자 클로드 케텔의 《장벽》은 인간이 세운 수많은 ‘정치적인 벽’을 통해 인류 역사를 들여다본다. 중국의 만리장성부터 소련의 철의 장막, 베를린 장벽 등 역사 속으로 사라진 장벽들을 조명하고 이스라엘이 테러 방지를 명분으로 세운 요르단강 서안의 장벽,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불법 이민자를 막기 위해 멕시코 국경에 세운 ‘부시 장벽’의 성격을 파헤친다. 물론 한국의 휴전선도 빼놓을 수 없는 장벽 중 하나다. 인도 중동 키프로스 등에 세워진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장벽들도 소개한다.
장벽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제 장벽의 시대는 끝났다.’ 세상은 자유와 평등을 향해 진보하는 것처럼 보였고 세계화로 인해 이는 더 가속화될 거라 믿었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사반세기가 돼가는 지금, 장벽은 사라졌는가.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강조한다. 국경 분쟁, 불법 이민, 테러리즘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새로운 장벽들이 생겼고, 또 생기고 있다.
2006년 10월26일 부시 전 대통령은 ‘안전한 국경장벽법(Secure Fence Act)’에 서명했다. 멕시코와의 국경지대에 700마일(약 1127㎞)에 달하는 새 장벽을 건설하는 법이다. 예산은 약 15억달러로 추산됐다. 하지만 이 장벽의 기능은 정말 멕시코인들의 불법 월경을 막기 위한 것일까. 저자는 미국의 의도는 애리조나 사막에 세워 놓은 장벽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황량한 공간에 덩그러니 서 있는 장벽은 ‘선포’의 기능을 할 뿐이다. 진짜 감시는 최첨단 기술이 따로 수행 중이다.
장벽들은 비난받는다. 인권과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 경계 짓기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장벽 자체는 죄가 없다고 말한다. 유럽연합은 미국이 설치한 장벽을 두고 고귀한 척 훈계를 해댔지만, 세우타와 멜리야에 들어선 (불법 이민을 막기 위한) 똑같은 장벽 건설에 자금을 댔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데올로기로 장벽을 옹호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장벽 자체가 아니라 장벽이 들어설 수밖에 없었고 유지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꿰뚫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흥미롭지만 각 장벽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는 데 치중한 점은 아쉽다. 장벽의 본질적 의미를 짚는 데 더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면 더 깊이 있는 책이 됐을 법하다. 부시 장벽 근처에 사는 농민이 “정부는 국경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국경에 대한 미국인의 생각을 통제하는 것”이라고 말한 통찰처럼 말이다. 사진과 지도를 곁들여 친절함을 더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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