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후반 들어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사회에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인류에 가난의 극복과 조화롭고 보편적 풍요를 보장하는 세계를 실현할 것이라는 믿음이 지배했다. 그런 믿음은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등 영국 경제학자들에 의해 비롯됐다. 이 자유 경제학에 기초해 독일도 영국처럼 19세기 초부터 자유무역, 재산권의 보편적 허용, 영업의 자유 등 친시장 개혁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같은 개혁은 빈곤, 불평등, 실업, 사회갈등을 초래하기에 독일 경제가 갈 길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정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하는 사회주의가 조화롭게 번영을 이끄는 길이라고 갈파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강단 사회주의자’(school socialism·1873년 창립된 독일 사회정책학회에 참가했던, 사회개량을 주장한 사회정책학자들의 사상적 경향)로 알려진 독일 출신 경제학자 구스타프 슈몰러(1838~1917)다.
경제 관련 고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경제문제에 관심을 두고 경제학에 입문한 슈몰러가 평생의 과제로 여긴 건 영국 경제학을 뛰어넘어 후진된 독일 경제를 이끌 수 있는 ‘독일 경제학’을 구성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가 주목한 것은 영국 경제학의 인식방법을 극복하고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는 일이었다. 복잡한 현실을 형식화·단순화해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이론을 연역적으로 도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영국 경제학의 방법인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추상적 이론은 현실과 동떨어져 쓸모없다고 슈몰러는 목소리를 높인다. 모든 나라는 제각기 다르고 고유한 특징을 지닌 사회를 갖고 있기에 모든 사회에 적용될 보편적 이론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일침을 가한다.
슈몰러가 영국 경제학의 자유무역이론을 반대하는 것도 그 같은 논리에서다. 그 이론은 성장 과정이 영국과 같은 나라에만 타당할 뿐 후진된 독일 경제에 적용했다가는 치명적인 피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론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경제를 인식해야 한다는 게 슈몰러의 방법론적 시각이다. 역사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래서 경험적 데이터에 대한 전례 없는 탐구에 몰두했다.
역사연구를 통해 슈몰러가 발견한 건 무산자, 빈곤, 실업, 고통, 도시화, 열악한 주거환경 등의 사회 문제였다. 이를 가져온 게 영국 경제학을 모방한 친시장 개혁이라는 주장도 덧붙인다. 자본주의는 그런 문제들까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영국 경제학이 뻔뻔스럽다고 꼬집었다. 영국 경제학은 이기심을 강조한 나머지 서민층의 ‘가난의 공포’도 인식하지 못하는 비현실적 이론이라고 공격한다.
그런 사회 문제를 방관할 수 없기에 경제학은 윤리학이 돼야 한다는 게 슈몰러의 견해다. 그는 노사관계를 정립할 윤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재산의 불평등에서 생겨나는 악을 줄이고 부의 편중을 줄이는 게 학자의 과제라는 것이다. 슈몰러는 노동자 보호, 서민주택 등 다양한 사회정책을 쏟아냈다. 실업·질병·노후에 대비한 국가의 강제보험 도입으로 삶의 공포를 해소해야 한다고도 했다. 기술교육, 노동자의 파업권, 부의 편중을 막기 위한 상속세 누진제도도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아젠다이다.
슈몰러는 평등사회를 요구하지 않았다. 사회의 몰락을 초래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중산층의 몰락이다. 두터운 중산층이 안정된 사회의 전제조건이라는 이유에서 사회정책의 목표도 중산층 확대에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감스럽게도 개인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는 큰 정부에 대한 슈몰러의 신뢰는 남다르다. 그는 정부가 인간 교화를 위한 도덕적 기관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사회문제 해결에 적합한 정치체제는 권위주의적 군주제라는 슈몰러의 생각도 흥미롭다.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개별 그룹의 이해관계를 둘러싼 투쟁으로 끝난다는 게 그의 인식이다. 민주정치는 보편적 이익보다 사회계급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얘기다. 유산자 또는 무산자의 당(黨)으로 정치가 양분돼 나타나는 격심한 계급다툼 현상이 민주정치의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그런 민주제로는 일관된 사회정책을 펼칠 수 없기에 필요한 건 유능한 관료 제도를 갖춘 강한 군주제라고 주장한다.
슈몰러가 서민층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진 것은 바람직하지만 19세기 친시장 개혁과 산업화가 빈곤, 실업 문제 해결에 기여한 역할을 과소평가했다는 지적이 많다. 사회에 대한 인식에서 슈몰러의 역사주의는 틀렸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이론이 없으면 경험적 데이터를 의미 있게 분석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슈몰러의 사상은 이런 비판의 여지를 남겼지만 역사학파를 주도하면서 독창적인 역사이론과 사회정책을 개발해 영국 경제학에 견줄 만한 독일 경제학을 확립하려는 그의 공로는 널리 인정받고 있다.
베버와 ‘과학의 가치판단’ 논쟁…중산층 확대 주장
슈몰러 사상의 힘
슈몰러 사상은 독일의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19세기 중반 이래 ‘국민경제학회’를 조직해 다양한 방법으로 자유주의 사상과 친 시장개혁을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에 등장했다. 슈몰러는 자유주의는 외래품이기에 독일 경제에 적합하지도 않고 빈곤, 불평등 등 사회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슈몰러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창시한 칼 멩거와 세기적인 방법론 논쟁으로도 유명하다. 그 논쟁에서 이론을 중시한 멩거를 제치고 역사를 중시하는 슈몰러가 승리했다. 슈몰러의 승리로 독일 경제학자들은 이론적 구상에는 더욱 더 흥미가 없어졌다. 그런 역사학파의 잘못을 또렷하게 보여준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매일같이 급상승하는 1918~1923년의 악성 인플레 문제였다. 독일 경제학자들은 속수무책이었고 이론을 무시하는 역사주의는 몰락하고 말았다.
경제학에서 윤리를 강조하는 슈몰러는 과학의 가치판단 문제와 관련해 막스 베버와 일전을 벌였다. 슈몰러는 어떤 목적들이 윤리적으로 바람직한지에 대해 판단하고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베버는 그런 건 과학의 역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탈가치판단 논쟁은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됐는데 베버의 승리로 끝을 맺는다.
슈몰러는 사회정책 운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사회주의자들과 사회정책학회를 설립했다. 이를 계기로 그의 사회정책 사상은 정치적·학문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게 됐고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국민경제학회와 대결할 수 있었다.
슈몰러와 사회정책학회는 19세기 말께 비스마르크의 유명한 복지정책의 강력한 정책적·학문적 뒷받침이 됐다. 그의 사회정책 사상은 오늘날 독일 복지국가의 사상적 기초가 됐다는 점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20세기 초 독과점 규제정책과 복지정책 등으로 미국 사회를 개혁할 것을 주장한 좌파운동의 ‘진보주의’도 슈몰러를 비롯한 강단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배운 그 유학생들이 앞장서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민경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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