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정치가 삐거덕대는 이유 중 하나는 여론이라는 명분이다. 정치권은 여론이나 다수결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자신들의 주장만을 고집한다. 특히 민감한 이슈가 생길 때마다 정치권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을 들먹이며 국민의 뜻이 그들에게 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여론엔 함정도 많다. 성향이 한쪽으로 치우친 표본을 모집단으로 해 여론조사를 할 경우 결과도 당연히 왜곡된다. 또한 여론은 속성상 공익보다는 사익에 표를 몰아주는 경향이 강하다. 대의정치 형태를 띠는 민주주의가 여론을 중요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맹목적으로 여론만을 좇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여론이나 선거, 대의제도 등에 관련된 대표적 용어를 정리한다.
콩도르세 역설-다수결이 만능?
프랑스 대혁명시대의 정치가이자 수학자인 콩도르세가 다수결이 만능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려 한 논리다. ‘투표의 역설(voting paradox)’이라고도 불리는 콩도르세의 역설은 최다득표제가 유권자의 선호도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한 유권자가 A를 B보다 선호하고(A>B), B를 C보다 선호할 경우(B>C), A를 C보다 좋아해야 한다(A>C). 하지만 최다득표제하에서는 이 같은 선호 이행성에 위배되는 결과(C>A)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 다수결을 통한 투표가 구성원의 선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한마디로 다수결에도 큰 함정이 있다는 것이다.
보르다 투표-순위에 점수 부여
콩도르세와 같은 시대를 산 수학자 보르다는 유권자의 선호도를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해 후보에게 순위를 매겨 점수를 부여토록 했다. 예를 들어 1위는 10점, 2위는 9점을 주는 식이다. 1위를 많이 획득한 사람의 점수가 높은 것은 분명하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MVP를 선정할 때 이 방식이 적용된다. 투표권이 있는 기자들은 1등부터 10등까지 순위를 매긴다. 1등에겐 14점, 2등에겐 9점, 3등에겐 8점, 4등에겐 7점을 주며 10등에겐 1점을 부여한다. 최고 총점자가 MVP를 받는다. 하지만 이 경우 1등 수가 적어도 MVP가 된다. 1999년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이반 로드리게스보다 1위 표를 많이 받고도 총점에서 졌다. 순위의 편차가 큰 데 따른 결과다.
애로의 정리-합리적 결정 불가능
케네스 애로는 일반균형이론과 후생경제학에 크게 공헌한 경제학자로 197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그의 학문이론은 수순이론적이며, 그 방법론은 수리경제적이었다. 그는 아예 민주주의가 전제로 하는 합리적 의사결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1951년 대학원 시절에 쓴 ‘사회적 선택과 개인의 가치’라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다수결에 따른 의사결정이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회효용함수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5가지 조건을 제시하면서, 이들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5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사회후생함수가 존재할 수 없음을 밝혔다. 4가지를 만족시킬 경우 나머지 한 가지 조건을 어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3%?-헷갈리는 오차범위
여론조사에서 항상 따라다니는 오차범위라는 개념도 잘 이해해야 한다. 오차범위를 무시하면 엉뚱한 결과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선거 출구조사에서 ‘A후보의 지지율이 51%이고 신뢰수준 95%에 오차범위 ±5%포인트’라면 A후보는 당선이 확실할까? 이는 A후보 지지도가 전체 유권자를 대상으로 조사하면 46~56%(51±5%포인트) 사이에 있을 확률이 95%라는 뜻이다. 당연히 이 후보의 득표율이 과반수에 미달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필리버스터-의사진행 고의방해
필리버스터(filibuster)는 국회에서 소수파 의원들이 다수파의 독주를 막거나 기타 필요에 따라 합법적인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 의사진행을 고의로 방해하는 행위를 말한다. 흔히 질문 또는 의견진술이라는 명목으로 행하는 장시간의 연설, 규칙발언의 연발, 각종 동의안과 수정안의 연속적인 제의 및 그 설명을 위한 장시간의 발언 행위 등이 있다. 이런 의사방해는 법규상으로는 하자가 없지만 정치적 도의나 의회정치 본연의 모습에서는 벗어난 것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의사방해가 무제한으로 자주 용납된다면 국회의 기능은 사실상 마비돼 그 존재 의의를 상실하게 된다. 오늘날 많은 국가들은 의원들의 발언시간이나 의사진행 절차를 규제해 고의로 의사진행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법과 규칙을 강화하는 추세다.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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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쭉날쭉' 여론조사…어디까지 믿어야할까?
1948년 미국 대선에서 해리 트루먼의 역전승은 미국 정치사상 최대 이변으로 꼽힌다. 선거운동이 시작된 9월 초 공화당 후보 토머스 듀이는 여론조사에서 현직 대통령인 민주당 트루먼을 13%포인트나 앞섰다. 언론, 여론조사 기관,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듀이의 압승을 점쳤다. 승부가 뻔한 대선에 불필요한 비용만 들어간다고 판단한 갤럽 등 여론조사 기관은 투표일 수주일 전 여론조사를 아예 중단했다. 시카고트리뷴은 개표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듀이가 트루먼을 패배시키다’는 제목의 1면 머리기사 신문을 찍어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트루먼은 49.6%의 득표율로 듀이(45.1%)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모두의 예상을 깬 트루먼의 역전승은 ‘여론의 함정’을 논할 때 자주 언급된다.
로마시대에는 한때 2~3년마다 시민들의 가치관을 조사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현대사에서 여론이 정치적 힘으로 등장한 것은 18세기다.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프랑스 혁명(1789년)을 여론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시점으로 본다. 오늘날과 같은 과학적인 방식으로 여론조사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 미국에서다.
우리나라 선거 여론조사는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처음 시도됐다. 하지만 여론조사 기관마다 결과가 다르고 실제와 차이가 많다는 지적도 있다. 정부 정책 등에 대한 여론조사에선 여론조사 주체에 따라 결과가 들쭉날쭉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균형 잡힌 사회를 위해선 균형 잡힌 여론과 합리적인 여론조사가 필요하다. 민주주의 의사결정 원리는 기본적으로 여론과 다수결이지만 여론과 다수결에도 함정은 이곳저곳에 도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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