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키 도시후미 세븐앤드아이홀딩스 회장, 직원 15명으로 세븐일레븐 시작…유통 공룡으로 키운 승부사

입력 2013-12-13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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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영광에만 머물러선 안돼…성공기억 상실증에 걸려라"

글쓰기 좋아한 기자 지망생
방송사 창업 자금 유치하다 평생의 멘토 이토 사장 만나 유통업체 평사원으로 입사

출발은 사내 벤처
일본 최초 편의점 체인 도입
창업주 2세 제치고 CEO 올라…日 최고 우수기업 영예 달성



[ 이미아 기자 ]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매년 발표하는 일본 우수기업 평가 순위보고서 ‘나이시스(NICES)’. 일본 재계에선 이 NICES 1위에 오르는 게 큰 영예로 받아들여진다.

대부분 NICES 1~5위권은 제조업 또는 금융계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지난달 29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서 밝힌 NICES 1위 기업은 일본 최대 편의점체인 세븐일레븐의 모회사 세븐앤드아이홀딩스였다. 일본을 대표하는 대기업인 도요타는 2위였다.

세븐앤드아이홀딩스는 자체 상표(PB) 상품을 대거 출시하고, 노년층 타깃 마케팅 및 해외 진출을 강화했다는 점을 인정받아 성장 잠재력 부문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며 처음으로 1위에 올랐다. 소매유통업체가 1위에 오른 건 매우 이례적이었다.

올해 명실상부한 일본 최고의 대기업으로 선정된 세븐앤드아이홀딩스는 현재 스즈키 도시후미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81·사진)가 이끌고 있다. 스즈키 CEO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성공하고 싶으면 ‘성공 기억 상실증’에 걸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영광에 머무르는 사람에게 기다리는 건 미래의 실패뿐”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리고 실제 그가 걸어온 길 또한 끊임없는 변화의 연속이었다.

○기자 지망생, 유통업계에 발을 디디다

1932년 나가노현에서 태어난 스즈키는 도쿄 주오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가 중간에 경제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그에겐 법학이 너무나 딱딱해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즈키는 글쓰기를 좋아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스즈키의 꿈은 기자였다. 그는 여러 언론사와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고, 1956년 대학 졸업 후 도쿄출판판매 홍보부 사원으로 들어갔다.

스즈키가 유통업계에 발을 디디게 된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그가 서른 살 때 친구들과 함께 소규모 방송사를 차리기 위해 자금을 모으려 여러 기업에 협찬 의뢰를 하러 다니다가 당시엔 신생 소매유통기업이던 이토요카도를 알게 된 것이었다.

이토요카도의 창업자이자 훗날 그의 평생 멘토가 되는 이토 마사토시 당시 사장은 “방송사를 만들고 싶다”며 일면식 없는 자신을 찾아온 당찬 스즈키를 눈여겨 보고 “방송사 대신 우리 회사에 들어오라”고 그에게 권했다. 스즈키는 고민 끝에 기자 대신 유통업계에서 일하는 길을 택했고, 1963년 이토요카도의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15명의 ‘외인부대’로 시작된 세븐일레븐

스즈키는 이토요카도에 들어온 후 영업부에 배치됐고, 이후 인사관리 부문 총괄 간부로 승진해 이토 사장의 ‘심복’이 됐다. 이토 사장은 중요한 경영 결정을 내릴 땐 언제나 스즈키를 불렀다.

입사한 지 10년이 됐을 때 스즈키는 “이토요카도의 전환점이 될 만한 신규 사업 아이템을 발굴해 오라”는 지시를 받고 미국에 갔다. 그리고 거기서 미국 사우스랜드가 운영하던 편의점체인 세븐일레븐을 처음 알게 됐다.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영업하고, 다른 가게들이 문을 닫는 일요일에도 영업한다는 콘셉트의 소매점포가 일본엔 당시 한 군데도 없었다.

스즈키는 회사에 세븐일레븐 체인을 일본에 들여오자고 제안했다.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모두가 대형 점포를 짓는데 갑자기 무슨 소형 편의점이란 이상한 소리냐”는 게 거부의 가장 큰 이유였다. 또 “그 시간에 어느 손님이 오겠느냐” “휴일 근무자는 어떻게 뽑겠느냐” 등 여러 반론이 제기됐다. 이토 사장은 스즈키에게 “체인을 들여오게 해 줄테니 체인을 관리할 사내 벤처를 스스로의 자금으로 꾸리라”고 지시했다.

스즈키는 어렵게 자금 1억엔을 마련하고 미국 사우스랜드와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은 뒤 1973년 ‘세븐일레븐재팬’이란 이름의 사내 벤처를 만들었다. 일하려는 직원이 없어 전직 노조운동가, 제빵사 영업사원, 비행기 조종사 출신 등 유통업과는 전혀 관계가 없던 15명을 경력직으로 뽑았다. 그리고 이듬해 5월 도쿄에 세븐일레븐 1호점을 열었다. 일본 최초의 편의점이었다.

○창업주 2세 대신 최고경영자에 올라

사내에서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세븐일레븐은 예상 밖으로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편의점은 언제든지 가도 필요한 물품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환영받았고, 세븐일레븐은 업계 선발주자로 이름을 알렸다. 세븐일레븐은 첫 매장이 세워진 후 6년 만에 매장 1000개를 돌파했다. 1991년엔 세븐일레븐의 원래 모회사인 사우스랜드를 인수하고, 세븐일레븐을 일본 브랜드로 완전히 바꿨다. 현재 세븐일레븐의 일본 내 점포 수는 지난 9월 말 현재 1만5852개다. 또 한국과 미국, 중국에도 진출해 있다.

1992년 이토 사장은 스즈키에게 이토요카도의 회장 겸 CEO직을 승계하겠다고 발표했다. 그의 장남인 이토 야스히사가 뒤를 이으리라던 사내 및 관련업계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었다. 1985년 이토요카도에 입사한 이토 야스히사는 4년 만에 서른다섯 살의 나이로 이사가 됐고, 1991년엔 상무가 됐다. 누가 봐도 이토요카도의 차기 CEO는 이토 야스히사에게 돌아갈 것으로 비쳐졌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토 야스히사는 1995년 전무가 됐다가 2002년 사임했다.

이토요카도의 CEO가 된 스즈키는 “현장을 중시하고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자신의 경영원칙을 더욱 강력히 실천했다. 그는 세븐일레븐 매장을 관리하는 ‘현장 운영 책임자(OFC)’란 직책을 새로 만들고, 1주일에 한 번 OFC들을 대상으로 직접 강의했다. 이 강의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스즈키는 2005년 9월엔 아예 세븐일레븐과 세븐일레븐의 모회사인 이토요카도, 이토요카도의 또 다른 자회사인 데니스 등 3사를 합병해 지금의 세븐앤드아이홀딩스를 출범시켰다. 세븐앤드아이홀딩스는 편의점과 대형마트, 백화점과 소매금융사 등을 아우르는 거대 유통공룡으로 거듭났다.

○아베 정권에도 쓴소리 아끼지 않아

스즈키는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새벽에 눈을 떠서 일기예보 체크와 신문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그는 OFC 대상 강의에서 “일본 전국시대의 책략가들은 아무리 사소한 정보라도 절대 그대로 버리지 않았다”며 “고객들의 생활 및 소비패턴의 변화를 알아챌 단서가 되는 것이라면 무조건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즈키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집권여당인 자민당 측에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는 지난해 12월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는 공공사업보다 민간 기업 지원에 더욱 힘써야 한다”며 “민간 기업을 기반으로 한 성장 없인 국가 재정난과 사회보장 확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지난 7월엔 소비세율 인상과 관련해 “지금은 소비세를 올릴 시기가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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