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병목에 걸린 M&A 매물

입력 2013-12-15 21:03   수정 2013-12-16 05:10

유근석 <증권부장 ygs@hankyung.com>



[ 유근석 기자 ] 2008년 3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취임 후 공정거래위원회 첫 업무보고에서 “직접 소비재가 아닌 반도체 업체의 경우 세계시장과의 경쟁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묘한’ 발언을 했다. 기업결합심사는 “기업 규모와 국제경쟁력 측면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 뒤 반도체 업종을 구체적으로 적시했고, 여러 해석을 낳았다.

최고경영자(CEO) 출신다운 직설 화법은 하이닉스반도체 인수합병(M&A)경쟁에 삼성 LG 등 국내 대기업들이 참여하는 데 제한을 두지 않을 것이며, 두지도 말라는 가이드라인으로 읽혔다. 그의 사돈뻘 기업인 효성까지 나섰다가 2009년 11월 SK그룹 품에 안긴 하이닉스반도체의 새 주인 찾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게 M&A 전문가들의 평이다.

달러 박스 된 SK하이닉스

SK 날개를 단 하이닉스는 경쟁자들이 쓰러질 때까지 실탄을 쏘는 반도체 치킨게임에서 글로벌 승자가 됐고 다시 찾아온 D램 호황을 만끽하며 우리 경제의 ‘달러 박스’로 변신했다.

‘기업을 살리는 금융’이라는 거창한 정책구호에도 재계 10위권 STX그룹이 맥없이 쓰러지고 ‘동양 부실사태’의 충격파가 이어지면서 금융당국과 채권단은 호떡집에 불난 모습이다. 동부하이텍 등 3조원 규모의 핵심 계열사 자산을 한꺼번에 묶어 특수목적회사(SPC)를 통해 판다는 ‘동부식(式) 구조조정’이라는 조어도 등장했다. 뒤를 따르라는 압박에 현대그룹은 현대증권 등 몇몇 계열사 지분을 곧 내놓을 듯하다. 자본시장에선 매각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우리투자증권을 비롯해 10대 증권사 중 4곳이 팔릴 운명에 처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다.

쌓여있는 매물 40조원 달해

412조3000억원에 이르는 부채를 줄이지 못하면 CEO를 문책하겠다는 정부의 통첩을 받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수자원공사 등 12개 공기업은 내년 1월 말까지 자산매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몰아치기식’ 공기업 자산 매각을 놓고 벌써부터 헐값 논란이 나온다. M&A업계 일각에선 기업, 금융회사, 공기업 자산 매물만 어림잡아 30조~4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그런데 어떻게 팔고 누가 살 건가. 경제민주화, 순환출자 논란을 딛고 백기사로 나설 만한 대기업은 기대하기 어렵다. 국민연금과 정책금융공사가 지난 10일, 11일 동부익스프레스 인수를 위한 사모펀드(PEF) 투자안을 보류하며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인 것도 좋지 않은 징후다. 금융위원회가 부실 증권사 간 합병을 유도하고, M&A 증권사엔 투자은행(IB) 허용 요건을 완화해준다는 방안을 발표했으나 그럴 만한 의지와 여력을 갖춘 증권사가 있을지 알 수 없다. 대우인터내셔널을 인수하는 등 국내 M&A시장의 ‘큰손’ 몫을 해온 포스코가 외국인 주주에게 배당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돈으로 계열사를 늘린 것을 놓고 ‘방만경영’으로만 폄하하고, 낙하산을 떨어뜨려 개혁하겠다고 벼르는 게 현 정부 실세들의 의식수준이다.

매물만 쏟아낸다고 해서 선제적 구조조정이 되는 건 아니다. 욕을 먹더라도 누군가 책임을 지고 길부터 터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물 보틀넥’에 걸려 앞차도 뒤차도 엉거주춤한 채 시간만 허비하는 꼴이 벌어질 게 뻔하다.

유근석 <증권부장 yg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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