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트레플러 페가시스템스 CEO "상대 움직임 보고 전략 짜라"…논리에 승부 건 '체스경영'

입력 2013-12-20 06:58  

'직관적' 업무관리 시스템 '대박'…오라클·IBM 제치고 '1위' 우뚝

두뇌싸움에 매료된 소년
세계 챔피언과 겨룬 '실력파'
이민자 부모님 성공 기대에 체스 선수 꿈 접고 취업

인간이 컴퓨터의 종이 됐다
프로그램 개선안 번번이 '퇴짜'
열받아 페가시스템스 창업, 한눈에 보이는 프로그램 '대박'

위기때마다 체스경영
금융위기 닥치자 'B2C 승부', 고객관리 프로그램·모바일 기업 인수
올해 3분기까지 순익 2250만弗



[ 남윤선 기자 ]
가로 세로 각각 8줄, 64칸으로 이뤄진 체스판. 한편에 16개씩 총 32개의 말. 그 위에서 수많은 경우의 수가 만들어진다. 체스를 ‘두뇌의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일반 사람은 규칙을 이해하는 것도 버거워하지만, 어린 시절 앨런 트레플러 페가시스템스 최고경영자(CEO)에겐 체스가 쉬웠다. “일단 판을 보면 기존에 갖고 있던 모든 데이터를 지웁니다. 그리고 말이 움직이는 패턴을 이해하고 분석하죠. 그 뒤에 전략을 짭니다. 상대의 반응에 따라 처음 전략을 조금씩 수정하죠. 논리적으로 사고하면 됩니다.”

트레플러는 한때 체스 선수를 꿈꿨다. 논리적이면서도 규칙이 분명한 체스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에서 컴퓨터공학과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체스의 단순함과 논리성을 기업 경영에 적용시키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가 1983년 기업회계, 결제 등의 업무처리시스템(BPM) 및 고객관리(CRM) 프로그램 회사인 페가시스템스를 창업한 이유다. 페가시스템스는 오라클, IBM 등 쟁쟁한 경쟁업체를 제치고 업계 1위에 올라 있다. 트레플러의 개인 재산가치는 10억달러(약 1조500억원)에 이른다.

○체스의 논리성에 매료된 청년

트레플러의 부친은 폴란드계 미국 이민 1세대다. 2차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홀로코스트(대학살)’를 피해 미국으로 넘어왔다. 어머니는 옛 소련 출신이었다. 죽도록 고생하며 젊은 시절을 보낸 트레플러의 부모는 어려서부터 “열심히 살아 성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트레플러가 관심을 둔 것은 따로 있었다. 체스였다. 그는 “두뇌 싸움이 재미있었다”며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에 게임에 대한 본능이 더해지면 기물들의 움직임이 저절로 눈앞에 그려졌다”고 말했다. 고향인 매사추세츠주 체스 대회에서 우승한 그는 대학 시절 세계대회에도 출전했다. 비록 전체 115위에 그쳤지만 토너먼트에서 당시 세계 챔피언인 팔 벤코와 무승부를 기록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다트머스대에서 경제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그는 처음엔 프로그래밍에 관심을 가졌다. 코딩 역시 체스와 마찬가지로 논리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코딩은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달았다. “코딩엔 오류가 너무 많았어요, 논리가 그대로 먹히는 체스와는 달랐죠.”

○“어떻게 이렇게 비논리적일 수 있지?”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은행과 보험회사 등을 전전했다. 체스 선수로도, 프로그래머로도 성공하지 못했지만 직장생활이 그의 인생의 변곡점이 됐다. 회사가 쓰는 BPM 프로그램 때문이다. 경영을 더욱 편리하고 쉽게 만들어 주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트레플러의 눈엔 너무 복잡하고 어려웠다. 그는 “나는 초보적 수준으로 디자인된 BPM 때문에 분개했다”며 “인간을 도와야 하는 수단인데, 거의 인간이 컴퓨터의 종이 돼 있었다”고 회상했다. 회사에 이런저런 제안을 했지만 범인(凡人)들은 그의 논리적 사고를 이해하지 못했다. “차라리 내가 만들자”는 생각으로 1983년 세운 회사가 페가시스템스다.

당시 페가시스템스가 내놓은 BPM 프로그램은 혁신적이었다. 그는 일단 비즈니스를 단계별로 나눴다. 그리고 각 단계에 대한 설명을 시각화했다. 사용자들이 그래픽을 보면 직관적으로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시각화된 그래픽을 재구성하는 것만으로 회사 내부의 복잡한 프로세스들을 처리할 수 있게 했다.

복잡한 프로그래밍 작업은 철저히 뒤로 숨겼다. HSBC,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대형 은행들은 물론 전에는 BPM 도입을 고려하지 않던 중소업체들까지 시장으로 끌어들였다. 페가시스템스가 독보적 활약을 보이면서 군소 경쟁업체들은 하나 둘 정리됐다. 지금은 페가시스템스를 제외하곤 IBM, 오라클 등 대기업만 시장에 남았다.

○“상대의 대응을 보고 전략을 수정하라”

체스의 논리성을 바탕으로 비즈니스를 시작한 건 일단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머지않아 도전이 찾아왔다. 그의 프로그램은 주로 은행들을 위한 것이었다. 2007년부터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되면서 은행들은 비용 절감에 나섰다. 어디까지나 보조 도구인 BPM에 대한 인기도 시들해졌다. 이때 다시 한번 트레플러의 ‘체스경영’이 빛을 발했다.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전략을 끊임없이 수정하는 것’이다.

그는 2010년 전례없는 기업 인수 계획을 발표했다. CRM을 전문으로 하는 코디안소프트웨어가 대상이었다. 은행업이 지는 대신 헬스케어, 통신 등 ‘B2C(기업이 소비자를 상대로 하는 비즈니스) 사업’이 뜨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런 회사들을 고객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CRM을 시작해야 했다. 트레플러는 수백만명의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기업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예전엔 고객들이 어떤 데이터를 입력하면 기업은 그 데이터를 받아 별도의 분석작업을 거쳐야 했다. 반면 페가의 CRM은 고객의 입력 정보를 직접 분석해 기업에 피드백을 줬다. CRM시장에서도 페가의 점유율은 점점 높아졌다. 미국의 컴퓨터 전문지인 컴퓨터 위클리는 “이 시장에서 분기별 1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는 페가시스템스가 유일하다”고 전했다.

‘모바일 시대’가 다가오자 트레플러는 다시 전략을 수정했다. 지난 10월엔 안테나소프트웨어라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기업을 사들였다. 이제는 기업이나 고객들이 데이터 입력을 PC보다 태블릿, 스마트폰 등 모바일 기기에서 더 많이 하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최근 내놓은 프로그램 ‘페가7’은 최고의 호평을 받고 있다. 정보기술(IT) 컨설팅 업체인 템킨그룹의 브루스 템킨 대표는 “IT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쓸 수 있다”고 극찬했다. 페가시스템스의 지난해 순익은 2190만달러였지만 올 들어 3분기 말까지 이미 225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제품이 인기를 끌면서 트레플러의 주머니도 점점 두둑해지고 있다. 나스닥에 상장한 페가시스템스의 주식은 올초 20달러 선에서 시작해 지금은 50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페가시스템스 지분의 52%를 갖고 있는 트레플러의 주식가치는 약 9억6000만달러로 추정된다. 미국 증권거래소 자료에 따르면 그가 1996년 이후 받은 배당금만 5000만달러가 넘는다. 총 재산이 최소 10억달러는 된다는 얘기다.

엄청난 부를 쌓았지만 그는 부모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 1995년 아내와 함께 세운 기부단체 ‘트레플러 파운데이션’을 통해 매년 매사추세츠 지역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물론 체스도 잊지 않고 있다. 체스 영재들을 키우는 학교를 운영하며 본인도 세계 체스 챔피언들을 초청해 종종 ‘일전’을 벌인다.

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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