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해넘이 여행

입력 2013-12-25 21:59   수정 2013-12-26 05:00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어허 저거, 물이 끓는다. 구름이 마구 탄다./ 둥둥 원구(圓球)가 검붉은 불덩이다./ 수평선 한 지점 위로 머문 듯이 접어든다.’ 이태극의 시조는 장엄한 서해의 일몰 장면을 물이 끓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검붉은 불덩이가 구름을 태우며 바닷속으로 잠겨드는 순간을 생생하게 포착한 것이다.

그러나 일몰의 절경은 그다음 순간에 온다. 뜨거운 해가 바다에 잠긴 직후 해면 위의 하늘이 점차 감청색으로 물들 때가 가장 아름답다.

오세영 시인이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이라고 노래한 것도 이 때문이리라.

날마다 뜨고 지는 태양이지만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순간의 감회는 새롭다. 온갖 시름을 헹궈 내는 소멸의 빛이자 새 꿈을 준비하는 잉태의 빛이 동시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국천문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가장 늦게 지는 해는 31일 오후 5시40분 전남 신안군 가거도에서 볼 수 있다. 육지에서는 전남 진도군 가학리의 일몰 시간이 오후 5시35분으로 제일 늦다.

해넘이 명소로 유명한 충남 태안 학암포에서는 오후 5시25분에 해가 저문다. 학암포의 일몰은 더없이 부드럽고 따스하다. 황금빛 채운(彩雲) 사이로 먼 섬들이 아롱지는 과정도 좋지만 해가 진 다음의 고즈넉한 잔광이 일품이다. 학암포에서 만리포까지 펼쳐진 97㎞의 태안 해변길도 어머니 품을 닮았다.

전북 부안 변산반도에서는 격포항과 모항 사이로 지는 해넘이를 맛볼 수 있다. 채석강의 층층바위 틈새로 스며드는 낙조 또한 오묘하다. 강화도 동막해수욕장에서 장봉도 너머로 떨어지는 해를 서해안 제일의 일몰로 꼽는 사람도 많다. 해남 땅끝마을 하늘을 비스듬히 껴안는 낙조와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을 쓰다듬는 노을, 순천만 갯벌의 S자 물길을 따라 천천히 미끄러지는 석양을 최고로 치는 이들도 있다.

최근에는 영종대교 근처 경인아라뱃길 인천터미널의 정서진이 인기다. 서울 광화문을 기준으로 국토의 정서쪽, 경인아라뱃길 자전거길이 시작되는 곳으로 조약돌 형상의 노을종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운치 있다. ‘낙조의 성지’로 불리는 을왕리 해변은 갯바위 해안의 오붓한 분위기 때문에 연인들이 많이 찾는다.

내일 다시 떠오르기 위해 지는 해는 아름답다. 그 숭고한 해넘이 현장으로 떠나는 가족여행도 의미있다. 올해는 31일과 새해 첫날 모두 날씨가 좋다고 한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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