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들이 주문 맞춰 스스로 생산과정 조정
[ 노경목 기자 ] 유전자(DNA)가 생물 개체의 운명을 결정하듯 인더스트리 4.0 기술이 적용된 스마트팩토리에서는 무선인식전자태그(RFID)가 제품을 좌우했다. 독일 서남부 카이저슬라우테른에 자리잡은 스마트팩토리의 생산과정은 ‘액체비누’라고 쓰인 손바닥만한 상표 뒷면에 부착된 RFID에서부터 시작됐다.
RFID에는 소비자의 피부상태에 따른 액체비누의 종류와 병 색깔, 뚜껑 색깔 등이 미리 입력돼 있다. 생산설비들은 자체 센서를 통해 RFID의 정보를 해석하고 그에 맞는 공정을 진행한다. 상표를 병에 붙이는 기기가 정보에 따라 RFID가 부착된 상표를 파란색 병에 붙이면 액체비누를 주입하는 기기는 또 다시 RFID 정보를 근거로 그에 맞는 액체비누를 주입하는 식이다.
뤼디거 다벨로 스마트팩토리 관리이사는 “스마트팩토리의 액체비누 생산 속도는 시중에 판매되는 액체비누 생산시설과 비교해 뒤지지 않는다”며 “이 자체는 초보적인 생산설비지만 인더스트리 4.0이 실제 공장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고 말했다.
카이저슬라우테른 스마트팩토리는 2005년 독일 내 5곳의 스마트팩토리 중 가장 먼저 설립됐다. 이 프로젝트에는 기업들도 함께 참여해 여기서 개발되는 기술을 자사의 생산현장에 바로 응용하고 있었다.
기업과 대학의 ‘스마트팩토리 연합군’
스마트팩토리는 인더스트리 4.0에 대한 체계적인 개념이 정립되기 전부터 만들어졌다. 카이저슬라우테른 스마트팩토리도 인더스트리 4.0에 대한 첫번째 논문이 발표된 2011년보다 일찍 설립됐다. 다벨로 이사는 “스마트홈 기술을 공장에 적용할 수 없을까라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라며 “이후 기기 간 인터넷(internet of things) 등 주변 기술이 발달하면서 인더스트리 4.0이라는 체계를 정립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거주자의 동선에 따라 불이 들어오고 음악이 나오는 스마트홈의 동작 인식과 제어 시스템에서 얻은 힌트가 스마트팩토리와 인더스트리 4.0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액체비누 생산시설은 2007년 만들어졌으며 2012년에는 전자식 자동차열쇠 생산시설을 갖췄다. 신규 생산시설을 계속 제작해 인더스트리 4.0의 생산방식을 기업들이 바로 현장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초기에는 독일인공지능연구소(DFKI)가 주축이 됐지만 지금은 기업과 대학, 연구소 등 27곳이 스마트팩토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스마트팩토리 방문 당시 일하고 있던 3명도 지멘스와 카이저슬라우테른 공대 등 각각 다른 조직에 몸담고 있었다. 지난해에는 미국의 통신장비업체 시스코가 스마트팩토리 프로젝트에 합류했으며 스웨덴 등 외국 대학도 참여 중이다.
데틀레프 쥘케 DFKI 공장시스템혁신팀장은 “인더스트리 4.0 관련 기술을 독일이나 특정 연구기관이 독점하기보다는 많은 기업들에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며 “어느 나라의 어떤 기업이나 대학이건 회원이 되면 스마트팩토리의 연구성과를 공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독일 생산현장은 이미 인더스트리 4.0
스마트팩토리를 통해 인더스트리 4.0은 독일 기업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 교육연구부가 중심이 된 인더스트리 4.0 개발그룹이 지난해 1월 기계설비업계 278개 기업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중 112개 기업이 관련 정보를 지속적으로 습득하고 있고, 51개 기업은 연구개발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3개 기업은 실제 생산현장에 스마트팩토리 관련 기술을 적용하고 있다고 답했다.
실제로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많은 독일 기업들은 스마트팩토리 기술을 생산현장에 적용하고 있다. 티센크루프와 자동차부품업체 보쉬는 전자식 핸들 등 고급 부품을 중심으로 이를 도입하고 있다. 밀레는 세탁기, BMW는 자동차 엔진 생산에서 여러 종류의 모델을 하나의 생산라인에서 만들기 위해 이 같은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중소기업 중에서는 유압밸브를 만드는 보쉬렉스록, 엘리베이터 모터를 생산하는 페스토 등이 스마트팩토리 기술을 통해 효율을 높이고 있다.
지멘스도 암베르크 공장을 중심으로 적용대상을 확대하고 있다. 이 공장에서 생산하는 1000여개의 전기제품을 스마트팩토리 시스템을 통해 유기적으로 연결하기로 한 것이다.
새로운 사업 기회도 잡아
인더스트리 4.0은 기업들의 생산효율을 높이는 것을 넘어 새로운 사업 기회도 열어주고 있다. 지멘스가 개발하고 있는 스마트팩토리용 소프트웨어 TIA(Totally Integrated Automation)가 대표적인 예다. 인더스트리 4.0에서는 기기 간 인터넷으로 연결된 생산시설이 어떻게 조합되느냐에 따라 생산효율은 물론 소비전력까지 달라질 수 있는데 TIA는 이를 최적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DFKI는 스마트폰에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하듯 스마트팩토리 관련 소프트웨어를 실행하는 것만으로도 효율성 향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피터 헤벡 지멘스 기업전략팀장은 “지멘스는 인더스트리 4.0 관련 기술 개발이라는 명확한 목표 아래 지난 수년간 소프트웨어 회사에 대한 인수합병을 진행해왔다”고 말했다.
카이저슬라우테른=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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