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창조'와 거리둬야
美 실리콘밸리가 융성한 건 워싱턴과 떨어져 있었기 때문…지재권 보호엔 더 관심을
복지는 공짜 아니다
재원 마련 위해 증세 필요…부가세 올리는 게 합리적…정부, 국민에게 필요성 설득을
[ 김홍열 기자 ]
“미국의 창조경제 요람인 서부 실리콘밸리가 융성한 것은 연방정부가 있는 동부의 워싱턴DC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승훈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국이 창조경제로 성장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해선 “미국처럼 창조와 정부 사이의 거리를 멀리 떨어뜨려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 모방시대엔 정부가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기업이 더 빨리 상황을 파악한다”며 “정부는 과감한 규제 완화를 통해 기업이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지식재산권 보호를 강화하는 데 역점을 두면 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지난해 말 서울대 연구실에서 진행됐다.
▷한국 경제가 저성장 늪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과거처럼 연간 7% 안팎의 고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국 경제도 다른 선진국들이 걸어간(점차 성장률이 둔화되는) 길을 가는 것이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양적완화 축소(테이퍼링)는 여전한 변수다.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이 상당히 탄탄해졌다고 본다. 지난해 Fed가 테이퍼링을 결정한 이후 다른 신흥국 시장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것과 달리 한국 시장으론 계속 자금이 들어오고 있는 게 그 증거다. 다른 신흥시장이 불안할 때 한국은 믿을 만한 시장이라는 의미다.”
▷엔저(低)가 더 큰 걱정이라는 시각도 있는데.
“지난해에는 (달러화와 엔화에 대해) 원화값이 많이 올랐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경상흑자가 기록적으로 나왔다. 옛날에 일본이 엔고(高)에도 흑자가 났다고 우리가 얼마나 부러워했나. 우리도 최근 원고-엔저를 비관적으로만 볼 필요가 없다.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이 양적완화로 자국 내 구매력을 끌어올리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도 득이 될 것이다. 한국 제품을 더 많이 수입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금리통화정책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나.
“미국 등 선진국이 양적완화를 중단하고 통화를 더 이상 풀지 않으면 선진국 금리는 오르게 된다. 해외로 나간 선진국 자금이 본국으로 돌아오면 신흥국 시장의 금리도 오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금리를 인하해 투자를 촉진해야 한다는 쪽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면 국제금리는 올라가는데 우리 금리는 내려가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렇게 되면 한국에 들어왔던 외국 자금이 다 빠져나갈 수 있다. 느닷없이 위기가 닥칠 수도 있다. 국제금리 동향을 주시해야지 일률적으로 금리를 높여야 한다, 낮춰야 한다고 할 순 없다.”
▷경기 회복기를 맞아 경제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얘기가 많다.
“한국은 중대한 전환기를 맞았다. 1960년대 이후 우리 경제는 미국제 제니스 라디오 등 선망의 대상이었던 제품을 만들어보자는 일념으로 발전해왔다. 제일 쉬운 것부터 만들어야 했다. 고난도 제품은 만들어봤자 미국제, 일본제, 영국제에 당할 수 없었다. 저임금을 바탕으로 쉬운 것부터 모방해 수출시장에서 저가공세를 폈다. 세계적으로 저임금 국가가 많았지만 한국처럼 저임금을 이용, 선진국과 비슷한 제품을 만들어보겠다고 달려든 국가는 별로 없었다. 자신감을 얻은 기업들은 품질 수준을 좀 더 높여보자, 좀 더 어려운 것도 만들어보자며 계속 도전했다.”
▷모방경제의 효율성에 한계가 온 것 같은데.
“그렇다. 한국뿐 아니라 20세기 후반 신흥국의 경제 발전은 산업혁명 이후 영국의 발전과는 다르다. 영국은 처음부터 창조 패러다임이었다. 반면 우리는 선진국을 뒤늦게 따라한 모방 패러다임이었다. 최근 들어 선진국을 거의 따라잡았지만 문제는 더 이상 모방전략으로는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도 모방경제의 전형 아니었나.
“2차 대전 이후 일본 경제가 7~8%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뭘 만들까 고민할 필요 없이 선진국에서 성공한 것을 따라하면 됐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은 목표로 삼은 언덕이 저기 있을 때 열심히 올라갔다. 그러나 언덕에 올라가보니 더 이상 모방할 대상이 없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일종의 ‘멘붕’(정신적 충격) 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잘라파고스(Japan·일본+Galapagos·갈라파고스섬)’라는 말이 있다. 이동통신 특허의 상당 부분은 일본이 갖고 있다. 하지만 일본 스마트폰은 세계 시장에서 잘 안 팔린다. 일본 안에서만 팔려서 갈라파고스에 사는 동식물처럼 고립됐다는 분석이다. 모방을 벗어난 창조경제를 일본이 제때 적절하게 수용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기치로 내걸었다.
“창조는 정부가 못 한다. 기업이 한다. 과거 모방시대엔 정부가 뭐가 잘될 거라고 제시도 했지만 지금은 기업이 더 빨리 상황을 파악한다. 창조시대엔 정부가 나서면 안 된다. 미국의 창조경제 요람인 서부 실리콘밸리가 융성한 것은 연방정부가 있는 동부의 워싱턴DC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모방과 창조경제를 가르는 또 한 가지는 지식재산권 보호다. 모방시대의 특징은 지식재산권을 경시한 것이었다. 선진국이 지식재산권에 대해 민감하게 나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요즘 기업들은 보유 자금이 많지만 투자를 안 하고 있다.
“대통령이 전국경제인연합회에 가서 투자해달라고 해봐야 기업들은 투자를 잘 안 한다. 곳곳에 쳐진 규제 그물이 기업들의 투자 의욕을 위축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규제를 철폐해 기업이 확실히 투자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최우선 정책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정부는 올해 내수를 활성화하는 데 역점을 두겠다는데.
“내수를 얘기하면 공산품을 수출하는 데만 신경쓰지 말고 국내에서도 더 판매하라는 얘기로 들린다. 그건 아니다. 수입산 중국제가 더 싼데 국산품을 국내에서 팔도록 제조업을 부양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내수는 서비스산업을 키워 살려야 한다. 우리가 중국 베이징까지 가서 이발하진 않는다. 서비스는 기본적으로 국내에서 조달하는 것이다.”
▷정부가 서비스산업 활성화를 위해 발표한 의료법인의 영리 자회사 설립 허용의 경우 반발이 심하다.
“제도를 바꿀 때는 항상 손해보는 사람이 생기고 이익을 얻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손해보는 쪽은 저항을 한다. 저항을 나쁘다고 몰아붙이는 것도 마땅한 일은 아니다. 그쪽도 이익을 보도록 다소 길을 터주면 된다. 예를 들어 개인병원에는 의료수가를 조정해줄 수 있다. 이익집단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바로 정치의 몫이라고 본다.”
▷복지 확대 재원 마련을 위한 부자 증세에 시동이 걸렸다.
“증세는 필요하다. 복지정책은 공짜가 아니라는 국민 인식도 필요하다. 복지는 내가 땀을 흘려 누리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어머니가 치매로 고생하실 때 집에서 모셨는데 하루 4시간 간병인을 활용했다. 절반은 환자 측이 부담하고 절반은 국가에서 지원하는 간병인 제도다. 참 고마운 제도다. 이런 복지는 일종의 보험처럼 생각하는 복지다.”
▷어떤 세금을 올려야 한다는 말인가.
“과거엔 생계비를 도저히 벌지 못하는 사람을 도와주는 게 복지라고 생각했다. 당시엔 소득세로 복지 재원을 확충하는 게 옳다고 봤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도 생활 무능력자가 아니지만 복지 혜택이 필요하다. 부가가치세를 올리는 게 합리적이라는 얘기다. 정부는 국민을 상대로 복지 재원의 상당 부분을 부담해야 할 현실적 필요성과 당위성을 설득해야 한다. 현행 부가가치세 10%는 낮은 수준이다. 소득 상위 몇 %로부터 세금을 더 거둬서 하는 복지는 코끼리에 주는 비스킷과 같다.”
이승훈 교수는 개도국 경제 문제 전문가…실증적 대안 제시 '정평'
2008년 제27회 다산경제학상 수상자인 이승훈 서울대 명예교수는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과 대기업 문제를 실증적으로 분석해 대안을 제시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그는 공학적 지식을 경제와 산업 분석에 접목해 크게 주목받았다. 경쟁 정책에 초점을 맞춘 공정거래법만으로는 대기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기업 간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지식재산권 보호가 중요하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1945년 서울 출생 △1970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1976년 미국 노스웨스턴대 경제학 박사 △1977~2010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2011년~ 안민정책포럼 이사장 △2013년~ 국무총리실 녹색성장위원회 위원장
△주요 저서=‘특정기업 지원적 산업정책의 전개-성과와 문제점’ ‘재벌 체제와 다국적 기업-경제 개발의 두 유형’ ‘역동적 균형성장 동력’ ‘북한의 사회경제적 변화’
김홍열 기자 com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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