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롯데마트 영등포점에는 매장 문을 열기 한 시간 전부터 긴 줄이 늘어섰다. 캐나다구스 몽클레르 등 인기를 끌고 있는 패딩점퍼를 백화점보다 30% 이상 저렴하게 판매한다는 소식에 소비자들이 몰려든 것이다. 이 점포는 준비한 패딩점퍼의 90% 이상을 당일에 팔았고 다음날 일찍 물량을 모두 소진했다. 이마트 롯데마트 등 대형마트들은 병행수입을 통해 해외 유명 브랜드 상품을 싸게 판매하고 올해부터는 병행수입 품목의 종류와 물량을 대폭 확대할 예정이다. 병행수입은 수입 상품의 가격 거품을 빼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지만 미흡한 병행수입품의 사후 서비스는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병행수입업자들의 무임승차 논란 역시 가중될 전망이다.
#제조업자 동의없이 수입
병행수입이란 외국에서 적법하게 제조된 물품을 구매해서 원 제조업자 또는 수입국의 전용 수입업자의 동의 없이 수입해 판매하는 것이다. 보통 이런 병행수입품은 상표 등 지식재산권(지재권)으로부터 보호받는 제품으로 위조품을 팔지 않는 한 불법은 아니며 일반적으로 공식 수입업체보다 가격이 싸다.
병행수입으로 인해 형성되는 시장을 정규 시장과 구별하는 의미에서 미국에서는 회색시장(gray market)이라 한다. 이는 병행수입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서 유래됐기 때문에 유럽 등에서는 병행수입을 통상 ‘parallel import’라고 부른다.
병행수입은 수출국과 수입국 양국 간 가격 차이로 인해 발생한다. 수입자가 가격이 저렴한 곳에서 물품을 구입, 가격이 비싼 곳에서 판매하면 그 차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 간 가격의 차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존재한다. 독과점 시장의 경우에는 가격 차별을 통한 독점 이윤의 획득 동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고 환율이 변동될 때 국내 가격이 조정되려면 일정 시간이 걸리므로 이 기간 동안 가격 차이가 생기기도 한다. 가격 차이의 이유와 상관없이 병행수입은 이런 가격 차를 해소하는 중재 역할이 가능하다.
#경쟁 촉진·가격 인하 효과
병행수입은 공식 수입업체 외의 유통업자가 제품을 유통함으로써 시장 경쟁을 유발해 국가별 가격 차별을 방지하고 수입품의 소비자 가격을 낮출 수 있다. 최근 병행수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경쟁법·정책위원회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호주는 저작물의 병행수입을 허용한 후, 음반CD 가격이 25~30% 정도 하락했고 EU에서도 병행수입은 수입품 가격 하락을 통해 시장 경쟁을 높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경제연구소(NERA)는 “병행수입은 일반적으로 유통시장에서 경쟁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제고시키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발표했다. 김주영 서강대 경영대학 교수는 “한 업체가 국내 판매를 독점하다 보면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진다”며 “외국에서는 중저가 브랜드가 한국에서는 고가 브랜드가 되는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병행수입품은 사후 서비스를 받지 못한다는 한계점이 있다. 이에 대해 병행수입 업체들은 “병행수입품과 공식 수입품을 소비자들이 혼동할 수 있지만 이는 병행수입 자체를 금지하기보다는 정확한 상품 표시를 함으로써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후 서비스 등의 문제점은 있지만 가격이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으므로 소비자가 물품 구매시에 비교해 선택할 수 있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AS 미비·무임승차 논란
그러나 병행수입으로 야기될 문제점도 적지 않다. 지정된 공식 수입업체는 제품 광고와 사후 서비스 등에 투자해 제품 품질 유지에 노력하지만 병행수입 업자는 이런 비용을 부담하지 않는다. 공식 수업업체의 제품 또는 브랜드의 신용에 대한 투자로부터 공짜로 이득을 보는 ‘무임승차’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또한 지정 수업업체 등은 상표권 독점에 따른 폐해가 문제된다면 이는 병행수입을 허용하는 것보다는 다른 제조업자의 시장 진입, 즉 브랜드 간 경쟁을 촉진해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AS를 받지 못하고 정품 여부를 소비자가 확인하기 어려운 점도 병행수입의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캐나다구스의 국내 공식 판매원인 코넥스솔루션 관계자는 “공식 판매원을 통해 구입한 소비자는 평생 AS를 받을 수 있지만 병행수입품을 산 소비자에게는 이런 혜택을 제공하지 않는다”며 “비싼 값을 주고도 공식 수입품을 사는 소비자가 많다”고 말했다.
미국 의류 브랜드 아베크롬비앤피치는 지난달 한국지사를 설립하며서 ‘병행수입과의 전쟁’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 회사 호거 쿤즈 법무팀장은 “가짜 병행수입 상품이 진짜로 둔갑해 팔릴 수 있다”며 “브랜드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 병행수입 매장을 없애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온라인몰에선 병행수입 제품을 주문받은 뒤 제때 물량을 공급하지 못해 큰 비난을 받기도 했다. 또 독점 수입업체들은 공들여 들여와 히트시킨 외국 제품을 대형마트들이 병행수입하는 것은 횡포라고 지적하고 있다.
손정희 한국경제신문 연구원 jhson@hankyung.com
공식업체도 가격 인하 효과…아동복 40%↓
최근 국내 대형마트 병행수입 상품이 좋은 반응을 얻음에 따라 병행수입 상품 종류와 물량이 대폭 확대될 전망이다. 이마트는 현재 100여개인 병행수입 브랜드를 올해 120개까지 늘리기로 했다. 캠핑용품 콜맨과 뉴발란스 키즈(운동화 가방), 타미 힐피거 여행용 가방 등을 추가로 병행수입하기로 한 것이다. 이마트의 병행수입 상품 매출은 2011년 100억원, 2012년 260억원, 2013년 600억원으로 매년 급증하고 있고 올해 병행수입 매출 목표는 800억원으로 잡았다. 안영미 이마트 해외소싱팀 부장은 “소비자 선호도 변화에 맞춰 병행수입 상품을 늘릴 예정”이라며 “중저가 위주에서 고가 상품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롯데마트는 탐스(신발) 에어로포스테일(의류) 레이밴(선글라스) 토리버치(가방) 등을 올해부터 병행수입 판매한다. 롯데마트는 병행수입 브랜드를 51개에서 70여개로 확대하고 관련 매출도 200억원에서 350억원으로 늘린다는 방침이다. 대형마트는 중간상인 없이 외국 도매상과 직접 거래해 병행수입 상품의 단가를 낮추고 있다.
업계에서는 대형마트가 병행수입에 적극 나서고 있어 연간 2조원으로 추정되는 관련 시장이 더 커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병행수입 시장 확대는 공식 수입업체의 가격을 떨어뜨리는 효과도 있다. 랄프로렌코리아는 병행수입품과의 가격 경쟁을 위해 작년 8월부터 아동복의 가격을 40% 낮췄다. 캠프 브랜드 스노우피크 역시 주요 제품 25개의 가격을 평균 16% 내렸고 해외 화장품 브랜드들도 가격 인하를 검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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