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법정 드라마

입력 2014-01-08 20:28   수정 2014-01-09 04:19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18세 히스패닉 소년이 아버지를 잔인하게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다. 12명의 배심원이 최종평결을 위해 회의실에 모인다. 모든 정황상 유죄가 확실하고, 유죄는 곧 사형이다. 그런데 8번 배심원이 홀로 무죄를 주장한다. 1 대 11이다. 거친 언쟁 끝에 증거를 재검토 하고 사건을 되짚어가면서 1 대 11이 6 대 6이 되고 다시 11 대 1로 뒤집어진다. 시종 유죄를 고집하던 배심원마저 무죄로 돌아서고, 바깥에는 시원한 소나기가 내린다.

시드니 루멧의 걸작 흑백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1957년)이다. 12명의 남자가 덥고 비좁은 방에서 96분간 오직 대화만 오가는데도 도무지 지루할 틈이 없다. 돈이 없어 좋은 영화를 못 만든다는 말이 말짱 헛소리로 들릴 정도다. 8번 배심원(헨리 폰다 분)의 합리적 의심은 민주사회에서 대중이 얼마나 쉽게 편견에 휩쓸리는지, 그리고 다수가 반드시 옳지는 않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법정드라마 전성시대다. 법이 일상 깊숙이 파고든 탓일까. 영화 ‘변호인’이 3주 새 800만명을 끌어모으면서 법정드라마 기획이 봇물이라고 한다.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법정 장면은 법조인들도 리얼리티를 인정할 만큼 수작이란 평가다. 작가가 2년간 법정을 취재하며 발품 팔았다고 한다. 존 그리샴처럼 진짜 변호사가 작가로 데뷔할 날도 머지않았다.

미드에선 ‘보스턴 리걸’ ‘저스티스’ 등에 이어 ‘굿 와이프’가 시즌5까지 제작되며 인기다. 이 드라마는 혼외정사로 퇴진한 스피처 전 뉴욕주지사의 부인이자 변호사인 실다를 모티브로 삼아 관심을 모았다.

어느 나라든 변호사 하면 고수입이 연상된다. 일본드라마 ‘리갈 하이’의 주인공인 백전백승 변호사는 “누구를 변호하든 상관없다. 내 목표는 재판에서 이기고, 돈을 많이 받는 것”이라며 한층 노골적이다. 거액 소송을 맡은 변호사를 레인메이커(rainmaker)라고 부른다. 가뭄에 기우제를 여는 인디언 주술사처럼 변호사는 희망을 주는 사람도 되고, 돈만 좇는 사람도 된다.

최근 영화 ‘부러진 화살’의 실제 인물인 박훈 변호사(47)가 재판 도중 법정을 나와 페이스북에서 판사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글을 올리고 창원지법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여 말썽이다. 영화 대사처럼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판사에 그 변호사요, 법조계 현실이 더 드라마 같다.

영화 ‘어 퓨 굿맨’(1992년)에서 해병사령관 잭 니콜슨은 버럭 화를 내다 무심결에 유죄를 시인한다. 무엇보다 냉정해야 할 법정에서는 먼저 화내면 지는 거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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