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
"60년간 군번 없는 무명용사로 알아…이제라도 명예 찾아드려 감개무량"
[ 백승현 기자 ]
지난해 봄 ‘밥퍼’ 최일도 목사(다일공동체 대표·사진)에게 국제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파견돼 국방부 한국문서 수집요원으로 근무하던 남보람 육군 소령(39·학군 35기)이었다. 남 소령은 “독립대대장 최희화를 부산으로 보내니 편의를 제공하라”는 내용의 유엔사령관 문서를 발견했다며, 최 목사에게 “부친의 사진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 부친의 유품을 뒤져 사진을 찾아낸 최 목사는 남 소령에게 사진을 보냈고 동일인물이라는 회신을 받았다. 평생을 무명용사인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가 ‘진짜 군인’이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지난해 6월 정전 60주년을 맞아 공개된 자료들로 뒤늦게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은 최 목사의 부친 최희화 8240부대 대대장(중령)이 9일 화랑무공훈장을 받는다. 최 목사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버지는 그저 군번 없는 무명용사인 줄 알았다”며 “이제라도 아버지의 훈장을 찾게 돼 감개무량하고 뿌듯하다”고 말했다.
1922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최 대대장은 6·25전쟁 당시 극동군사령부 한국연락사무소(켈로부대·KLO) 산하 8240부대 대대장으로 북한 지역에서 유격전을 펼쳤다. ‘백호부대’라는 애칭으로 불린 켈로부대는 1948년 창설한 첩보부대로 특전사의 모체다. 북한군 후방으로 침투해 정찰과 후방교란, 방해공작 등을 하는 게 주 임무였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이끈 팔미도 탈환 작전에도 참가했다.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새벽 상륙을 위해 등대가 필요하다고 판단, 켈로부대에 팔미도를 탈환을 지시했고 켈로부대원들은 북한군과 치열한 교전 끝에 등대에 불을 켰다. 이후에도 황해도 몽금포에서 북한군 1개 소대를 섬멸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휴전 이후 부대는 해체됐고 3만명에 달했던 켈로부대원들은 공식 계급과 군번이 없었기 때문에 보상은커녕 참전 사실도 인정받지 못했다. 최 대대장은 1971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최 목사는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6·25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며 “어머니조차도 아버지께서 민간부대원이었던 것으로 알고 계셨다”고 전했다. 훈장 수여식은 최 목사의 요청에 따라 맹호부대 명칭을 쓰는 경기 가평군 수도기계화보병사단에서 열린다. 이 부대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입대한 최 목사의 아들 산씨(31)가 병장으로 복무 중인 곳이다. 최 목사는 훈장을 특전사에 기증할 계획이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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