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低에 외국인 쇼핑객 늘어…정부는 "면세품 확대"로 지원
[ 도쿄=안재석 기자 ] 지난 1일 일본 도쿄 이케부쿠로에 있는 세이부백화점 본점. 새벽부터 정문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꼬박 밤을 새운 이들도 적지 않았다. 원래 개장 시간은 오전 10시지만 예상외로 사람들이 늘어나자 백화점 측은 어쩔 수 없이 30분 일찍 문을 열었다. 이 백화점의 요시다 고에이 부점장은 “문을 열고 두 시간 만에 2만여명이 몰려들었다”며 “예년보다 세일기간 매출이 10~20% 정도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방도 마찬가지였다. 히로시마의 소고백화점에도 이날 개장 전부터 작년보다 50% 이상 많은 5000여명이 줄을 섰고, 백화점은 개장시간보다 15분 빠른 오전 9시45분부터 손님을 맞았다. 백화점 관계자는 “이처럼 신년 세일 첫날이 북적이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 해 매출을 점치는 잣대인 ‘복주머니’도 불티나게 팔렸다. 일본 백화점은 정초마다 여러 물건을 넣은 ‘복주머니’라는 상품을 판다. 소비자들이 정확하게 어떤 상품이 들어가 있는지를 모르고 사는 게 특징이다. ‘복불복’인 셈이다. 일본 고급 백화점 체인인 다카시마야가 양말 88켤레(8800엔)를 넣어 만든 복주머니는 판매 시작 20분 만에 동났고, 세이부백화점의 와이셔츠 복주머니도 작년보다 하루 빠른 이틀 만에 다 팔려 나갔다. 한신백화점이 준비한 프로야구팀 한신 타이거즈 구단 기념품 복주머니 300개도 45분 만에 완판됐다.
일본 백화점업계는 한동안 ‘일본식 장기불황’의 상징이었다. 1998년 이후 줄곧 매출 감소 행진을 지속했다. 일본 전체 백화점 시장 규모도 8조엔대에서 6조엔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고객층 자체가 얇아진 데다 장기불황까지 겹친 탓이었다. 할인점과 편의점 등의 확산도 백화점의 부진을 부채질했다.
거의 빈사상태였던 일본 백화점업계가 이처럼 벌떡 일어나게 된 계기는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경제정책)였다. 아베 총리는 재작년 말 집권하자마자 대규모 금융완화정책과 재정대책을 동시에 실시했다. 시중에 돈이 풀리자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졌다. 주가가 오르고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서 부유층을 중심으로 ‘자산효과’도 나타났다.
일본 5대 백화점 체인의 월별 매출은 작년 하반기 이후 줄곧 전년 동기 대비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다. 긴자 신주쿠 등에 백화점을 갖고 있는 미쓰코시이세탄그룹의 지난해 11월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8.9% 늘었다. 비쌀수록 잘 팔렸다. 보석류 매출은 1년 전에 비해 36% 불어났고, 500만엔 이상 초고가 시계의 판매액은 4.5배 급증했다.
백화점 간 손님 잡기 경쟁에도 불이 붙었다. 일본 백화점 체인인 다카시마야는 도쿄 본점의 명품 매장을 최근 대대적으로 확대·개편했다. ‘랑방’ ‘질 샌더’ 등을 새로 들여와 취급 브랜드 수를 10% 이상 늘리고, 매장 분위기도 고급스럽게 새단장했다. 마쓰야백화점도 도쿄 긴자에 있는 본점의 고급 브랜드 매장을 이달 들어 20%가량 확대했다. 소비세율 인상을 앞두고 고가품을 미리 사두자는 가수요도 붙는 양상이다. 일본 정부는 4월에 현재 5%인 소비세율을 8%로 올리고, 2015년 10월에는 10%로 추가 인상할 예정이다.
엔저로 외국인 관광객이 늘어난 것도 호재다. 미쓰코시 긴자점의 지난해 11월 외국인 대상 면세품 판매액은 전년 동기 대비 160% 늘었다. 도쿄가 2020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것도 반가운 소식이다. 이데 요이치로 일본백화점협회 전무는 “작년에 일본을 찾은 관광객이 사상 처음 1000만명을 넘어섰다”며 “백화점업계도 외국인 전용 홈페이지를 만드는 등 손님맞이에 분주하다”고 말했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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