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시대를 구석기법으로 통제하나.’ ‘변화를 거부하는 네오 러다이트(neo-luddite)족(族).’ 원격진료 도입을 둘러싸고 1990년대에 제기됐던 비판들이다. 우리 사회가 원격진료 문제로 티격태격한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원격진료가 도입됐다면 이미 그 성패가 결론이 나고도 한참 남았을 기간이다.
의사협회는 여전히 원격진료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 반대논리라는 것이 갈수록 당당하지 못하다. 당장 설문조사만 해도 그렇다. 의협은 휴대폰 등을 활용한 원격진료 필요성에 대해 68.3%가 “필요하지 않다”고 답했다고 했다.
환자는 선택권이 없나
문제는 질문 항목이다. “병·의원이 가까워서 의사와 직접 대면진료가 가능한 경우에도 휴대전화 등을 활용한 진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정적 ‘프레이밍 효과(framing effect)’를 노린 전형적 수법을 동원했다. 만약 “병·의원이 너무 멀어 의사와 직접 대면진료가 불가능한 경우에도 휴대전화 등을 활용한 진료가 전혀 필요 없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으면 어땠을까. 오히려 “필요하다”는 긍정적 대답이 훨씬 많이 나왔을 게 틀림없다. 의협이 국민을 바보로 취급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식의 설문조사로 장난칠 수 있나.
의협은 환자의 선택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동안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달리 의료 접근성이 뛰어나 원격진료가 필요 없다는 게 의협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필요성에 대해 판단할 권한을 의협에 위임한 적이 없다. 그건 환자의 선택으로 가려질 문제이지 의협이 예단할 일이 아니다. 의협의 주장이 맞는지, 과연 오지에서도 그런지는 원격진료를 도입해 보면 보다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의협이 오진 가능성을 들먹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를 뒷받침할 아무런 객관적 데이터도 없이 환자한테 겁부터 주고 있다. 대면진료를 하면 오진이 전혀 없다는 보장이라도 있나. 환자는 바보가 아니다. 오진 가능성까지 다 따져서 질병의 종류, 처한 상황 등에 따라 대면진료든 원격진료든 선택할 거란 생각은 왜 못하는지.
의료법 사문화될 수도
원격진료를 하면 결국 대형병원으로의 쏠림으로 동네병원이 다 죽는다는 주장에 이르면 아예 어이가 없을 정도다. 이 주장이 맞든 안 맞든 그건 둘째 문제다. 주객이 전도돼도 유분수지, 무슨 병원 살리자고 환자가 있나. 환자의 선택에 따라 구조조정을 하든, 새로운 진화를 하든 그건 병원이 알아서 해야 맞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의료 길드가 활개를 치는 양상이다. 의협의 행태는 중세 길드의 ‘배타성’ ‘독점성’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길드는 새로운 기술에 반대하다 몰락하고 말았다. 이런 저항은 시장이 작고 경쟁압력이 약할 때는 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장이 커지고 안팎으로 경쟁압력이 높아지는 상황에서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의협이 지난 20년은 어떻게 버텨냈다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밖에서는 이미 상당한 기술진화가 일어나고 있다. 의료계 내부에서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 사람들은 ‘손 안의 의사’로 진화하는 스마트폰을 하나씩 들고 있다. 의협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소비자 주도 원격진료가 이미 현실로 나타났다. 의협이 이 도도한 흐름을 의료법이라는 방패로 막겠다고? 역사적 웃음거리만 하나 더 만들 뿐이다.
안현실 논설·전문위원·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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