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는 19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자유기업의 왕성한 활동의 영향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성장을 이뤘다. 1870년 4500달러이던 1인당 국민소득은 1915년 9000달러로 두 배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4000만명의 인구도 1억명으로 늘어났다.
이 같은 번영에도 불구하고 빈곤 불평등 독점 등의 문제를 제기하며 정부가 조세 정부지출 규제 등을 통해 경제에 개입하지 않으면 미국 자본주의는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진보주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자본주의의 심각한 위협은 독점 등의 문제가 아니라 통화의 불안정이라고 주장하는 경제학자가 등장했다. 미국 경제학자 어빙 피셔다.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물가를 안정화하는 게 정부의 제1 과제라고 주장했다.
대학에서 수학적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순수 수학에는 관심이 없었던 피셔는 자유주의 학자였던 윌리엄 섬너 교수의 조언에 따라 수학자로서 경제학에 입문했다. 당시 경제학은 흐름 인플레이션 힘 확장 수축 균형 유통속도 등 물리학적 언어를 즐겨 사용했다. 피셔는 그런 언어를 체계적으로 이용해 역학적 모델을 만들면 자본주의의 신비를 명쾌하게 풀어낼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경제 현상을 수리계량적 원리로 파악하는 수리계량경제학이 첨단 과학이라는 인식이 자리잡던 시기였다.
피셔가 주목한 건 자본과 통화이론이었다. 경제 안정과 직결된 분야라는 이유에서다. 그는 이자를, 동일한 액수라고 해도 현재의 소득을 미래의 소득보다 높이 평가한다는 시간선호, 그리고 투자된 소득은 장차 더 큰 소득을 가져다준다는 투자 기회가 상호 작용해 생기는 결과로 이해했다.
자본이란 매달 혹은 매년 소득을 가져다주는 자산인데 그런 자본의 가치는 시간선호 및 투자 기회의 상호 작용을 통해 창출되는 소득 흐름의 현재가치라는 것이다. 자본과 소득에 대한 이런 인식에서 그가 주목한 건 소득세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다.
현재의 소득에서 저축하고 이 저축을 자본재에 투자하면 나중에 소득이 창출된다. 그런데 소득세의 경우 자본재를 구입하는 데 사용된 소득에, 그리고 나중에는 그 자본이 창출한 소득에 과세해 저축은 이중으로 조세 부담을 진다는 게 피셔의 인식이다.
피셔는 이처럼 자본론의 시각에서 최초로 저축과 자본 축적에 적대적인 소득세 대신 지출세 즉 소비세를 제안한 인물이다.
관심을 끄는 건 자본 성격에 대한 피셔의 인식이다. 자본은 동질적이고 매우 유동적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자본이 이질적이고 그래서 한 용도에서 사용하던 자본을 다른 용도로 쉽게 사용하기가 어렵다면 적응 과정은 길어지고 회복하는 시간도 수년이 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이질성과 유동성은 불경기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피셔는 대신 화폐와 신용 문제에 주목했다. 이들이 물가 불안의 주범이라는 이유에서다. 여기엔 통화량이 두 배 늘어나면 가격도 두 배 인상된다는 이론적 인식이 깔려 있다. 인플레이션의 원인은 노동조합의 강성도 아니고 사업가의 탐욕이나 낮은 생산성, 독점자본주의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것들은 보조 변수에 지나지 않고 오직 화폐의 증가만이 인플레이션의 주범이라는 얘기다.
물가가 안정적이면 위기나 불황의 징조가 없고 경제가 마찰 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라는 게 그의 믿음이었다. 그래서 피셔는 물가가 오르면 통화량을 줄이고 물가가 떨어지면 통화량을 늘리는 등 일반물가 안정을 통화정책의 중요한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를 통화주의의 개척자라고 부르는 이유다.
피셔가 정책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건 통화량이 아니라 거시경제적 물가 수준이었다. 그래서 그는 물가 수준을 말해주는 물가지수를 작성하는 데도 주력했다. 이자율 및 환율 개입, 공개시장조작을 통한 통화량 조절 등을 통해 중앙은행은 물가를 안정시키고 장래의 불황이나 금융위기를 막을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그런 통화주의 인식에 비춰본 1920년대 경제현실은 피셔에게 멋들어지게 보였다. 물가는 안정적이었고 증시도 호시절을 맞고 있었다. 비행기 자동차 빵 기계 냉장고 전기 등 경제는 지속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광란의 1920년대’라고 부를 만큼 역동적 성장의 시기였다.
피셔는 주가는 영원히 하락하지 않는 고원의 경지에 도달했고 미국의 번영도 영원하리라고 공언했다. 수리경제학과 통화이론으로 명성을 날리던 그의 사상도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카드색인기계의 발명가로서도, 주식투자자로서도 성공했다. 그는 백만장자였다.
돈이 없어 식당에서 일하면서 대학을 다니던 피셔는 학문적 성공과 경제적 성공을 함께 거머쥔 입지전적 인물이다.
피셔 사상의 힘 유럽 세제개혁에 영향 미쳐…프리드먼 통화이론의 토대
물가 관리만 제대로 하면 경제에 대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어빙 피셔 사상의 핵심이다. 특정 부분에서 잘못된 투자가 있을 수 있지만 이는 단기적일 뿐이고 장기적으론 저절로 그런 투자 문제가 해소된다는 게 그의 낙관적 견해였다.
그러나 피셔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게 대공황으로 이어진 1929년 주식시장 붕괴였다. 주가는 하락하지 않고 경제 번영도 영원하리라고 장담하던 그의 학자적 명성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피셔의 이론으로는 경제 붕괴를 설명하거나 예측하기 곤란하다는 게 경제학계의 중론이다. 그의 이론은 통화팽창이 모든 부분에 일률적으로 물가 인상을 부른다는 내용이다. 1920년대 통화팽창의 결과가 또렷이 보여주듯이 늘어난 통화량이 모든 부문에 균일하게 흘러들어가는 게 아니라 분야별로 서로 다르게 영향을 받는다는 걸 직시할 필요가 있다. 당시 소비자 물가는 오르지 않았다. 제조업에는 생산 붐이 조성됐고 거품이 생겨난 곳은 부동산과 주식시장이었는데 이를 인식하지 못한 게 피서의 실수였다는 평가다.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데 사용되는 피셔의 물가지수도 오류가 있다는 지적이다. 물가 수준은 개별 상품의 가격을 가격지수로 측정한 평균치의 거시적 변수다. 그런데 이는 개별 기업이나 산업의 상대가격 변동, 그들의 사업 변동을 말해주는 지표가 될 수 없다는 지적이다.
피셔 사상은 이런 비판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은 작지 않다. 오늘날 스웨덴 등 유럽 국가에서 이중과세의 비효율성을 피하면서 저축과 자본 축적을 촉진하기 위해 소득세를 줄이고 소비세를 중시하는 세제개혁도 피셔의 직간접적 영향이 아닐 수 없다.
피셔의 통화이론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게 자유주의 경제학의 거성 밀턴 프리드먼의 통화주의라는 걸 주지할 필요가 있다. 그는 피셔처럼 1920년대를 안정적 번영의 시기라고 말하면서 대공황의 원인은 통화를 충분히 늘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해 피셔의 입장을 지원하고 있다.
민경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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