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호기 기자 ] 독일의 관문 도시인 프랑크푸르트를 처음 방문하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어?”하고 놀라는 순간이 있다. 공항에서 지하철로 연결되는 계단을 내려서자마자 곧바로 승강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미리 표를 끊어 개찰구를 통과해야만 승강장에 닿을 수 있는 한국과 다르다. 운임이 공짜인 것도 아니다. 기본 구간의 편도 요금만 4.2유로(약 6000원)에 달한다.
그런데도 개찰구나 감시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시민이나 관광객 모두 자발적으로 승강장 내 설치된 자동 매표기에서 표를 사서 열차에 탑승한다. 물론 독일이라고 해서 ‘무임 승차자’에 대한 단속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 독일 지하철에는 이른바 ‘암행어사’가 다니며 ‘양심 불량’ 고객을 적발해 무거운 과태료를 물리기도 한다. 물론 이에 따른 매출 손실은 개찰구를 만들고 직원을 고용하는 비용보다는 훨씬 적다.
이념이 서로 다른 정당이 대연정을 구성하고 상대 당이 집권 시절 추진한 정책까지 그대로 계승하는 독일 정치의 힘도 바로 이처럼 높은 수준의 사회적 신뢰에서 나온다. ‘역사의 종언’의 저자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스탠퍼드대 석좌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트러스트’에서 사적 혈연 관계를 넘어선 공적 신뢰를 사회적 자본으로 규정했다.
지금 한국은 어떤가. 나라 살림을 볼모삼아 새해벽두까지 극한 투쟁을 일삼던 여야는 이번엔 기초의회선거 공천권 문제로 또다시 격돌하고 있다. 이 사안은 또 2월 임시국회의 민생현안을 볼모로 잡을 게 불을 보듯 뻔하다.
대통령 선거 직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박근혜 대선 후보는 2012년 11월6일 “잘못된 제도와 관행을 모두 바로잡겠다. 기초단체의 장과 의원의 정당공천을 폐기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다. 정당 공천권 폐지 논란의 본질은 ‘위헌’ 여부도, 어느 당에 유리하느냐 등의 문제도 아니다. 공약(公約)을 손바닥 뒤집듯 ‘공약(空約)’으로 무시하는 정치문화가 또 한 번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여야 모두의 대선 공약이었던 이 사안이 이제 와서 당리당략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저신뢰 사회’라는 후진국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이호기 정치부 기자 hg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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