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일 전 경희대 교수는 철학책만 끼고 나돌던 ‘내놓은 아이’였다. 고교 졸업장도 겨우 받았다. 그런데 1년 놀다가 대학에 합격했다. 그것도 시험 없이 교장의 추천장만으로 들어갔다. 추천 내용은 ‘이 학생은 교보적(校寶的) 존재가 될 것을 보증한다’였다. 훗날 그는 뛰어난 문학평론가로 ‘학교의 보배’임을 입증했다.
학교 공부와 사회 공부의 균형을 중시하는 외국 대학들은 내신·시험성적보다 추천장이나 방과 후 활동을 먼저 본다. 추천장도 유명한 사람보다 아르바이트한 곳의 책임자가 솔직하게 써 준 것을 선호한다. 아인슈타인이 젊은 교사인 카를 포퍼에게 뉴질랜드의 대학교수 자리 추천장을 써서 자유주의 철학자의 앞길을 열어준 일화도 유명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추천장을 너무 많이 써주는 바람에 그 가치를 종잇장 가격으로 떨어뜨려 버렸다. 미국 서부에 스탠퍼드대를 세운 릴랜드 스탠퍼드도 “동부에서 일류대학 나왔다고 추천장 들고 오는 놈 중에 제대로 된 녀석을 본 적 없다”며 추천장의 허실을 지적했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출신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역시 “한국에 있을 때는 하버드대 추천장 많이 썼는데 유엔에 오니 엄격히 금지돼 있어 친구와 친척 부탁도 다 거절했다”고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자기추천서’를 직접 써서 후원을 얻은 경우도 있다. 그는 스포르차 공작에게 ‘성채공격용 사다리 설계’ 등 자신의 9가지 재주를 내세운 뒤 맨 끝에 ‘그림도 그릴 줄 안다’고 덧붙였다. 어느 시대든 진정 어린 추천은 보증의 징표로 통한다. 취업이 어려운 요즘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다 보니 대학들이 추천장을 마구잡이로 발급한다는 지적도 많다. 총장 추천장을 동사무소 증명서 떼어주듯 한다는 소리까지 나온다.
삼성이 채용방식을 바꿔 200여개 대학 총·학장에게 연간 5000여명을 추천 받아 서류전형을 면제하기로 하자 우려가 더 커지는 모양이다. 총장들도 삼성 추천장을 몇 장이나 받을 수 있을지 신경 쓰는 눈치다. 앞날이 달린 일이니 학생이나 교수나 기업이나 고민스럽다. 어디 솔로몬의 지혜 같은 해법은 없을까.
방정환의 수필 ‘몸에 지닌 추천장’에 어느 지배인의 채용 얘기가 나온다. 그는 추천장을 갖고 온 10여명은 돌려보내고 빈손으로 온 소년을 뽑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먼저 문에 들어서기 전 구두의 흙을 털었고, 문을 조용히 닫았으며, 기다릴 때 절름발이 소년이 들어오자 자리를 내주고, 바닥에 있는 책은 얼른 집어 올려놨습니다. 이게 바로 최고의 추천장 아니겠습니까.”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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