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성 "태생적으로 국가 폭력이 내재된 제도"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주민번호는 태생적으로 국민에게 범죄혐의를 씌우는 국가폭력을 내재하고 있다며 폐지하는 게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1968년 간첩과 불순분자를 색출하고 병역기피자를 적발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뒤 모든 국민에게 평생 변경할 수 없는 번호가 됐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국가는 물론 기업들도 개개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연결하고 감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피해가 상상 이상이라는 지적이다.
한 교수는 “인권이 보장되고 민주주의가 실현된 나라에서는 주민등록번호 같은 제도는 되도록 안 취하려고 노력한다”며 “스웨덴의 경우 복지행정을 관리하기 위해 비슷한 제도를 두고 있지만 행정 목적이 아닌 다른 용도로는 절대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아뒀다”고 말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함께하는 시민행동, 진보네트워크센터 등 시민단체들도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고 주민등록번호 폐지를 권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들은 “신분 확인에 대한 과도한 요구와 데이터베이스 연동에 대한 수요가 주민등록번호를 비롯한 개인정보의 수집과 이용을 조장하고 있다”며 “주민등록번호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는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역부족”이라며 인권위가 폐지를 권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kdb5478이라는 누리꾼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주민등록번호는 인터넷에 나뒹굴고 피해자 국민들은 피해보상 하나 못받고… 이럴거면 그냥 폐지하는 게 낫지 않아요?”라는 견해를 밝혔다.
반대 "개편은 필요하지만 폐지는 너무 지나쳐"
김민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주민등록제도와 주민등록번호를 혼돈해서는 안되며 주민등록제도는 행정과 공공서비스의 원활한 제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주민등록번호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잘못 사용돼 개인정보 유출의 마스터키가 됐다고 해서 번호를 폐지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번호체계를 개편할 필요는 있지만 폐지는 지나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주민등록번호제도 개편에 따른 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하고 보다 저비용 고효율의 개선방안을 도출하기 위해 현행 주민등록번호는 그대로 두고 행정청이 주민등록증을 발급할 때 별도의 시스템에 의해 개인별 고유번호를 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대안도 내놓았다.
한국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높은 수준의 치안을 유지하는 데 주민등록번호가 상당한 기여를 했다며 완전 폐지는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범인 검거 식별 등에 주민등록번호가 해온 역할을 생각하면 주민등록번호 유출 사태만을 두고 당장 없애자는 주장은 성급하다는 것이다. 복지 시스템 구축이나 기타 사회안전망 등에 개인 식별은 어느 사회나 필요한 것인 만큼 제도 개선이 더 시급하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새로운 번호를 부여하고 새로운 번호가 함부로 노출되지 않도록 규제하는 제도개선이 필요한 것이지 완전히 없애자는 것은 곤란하다는 이야기다. 독일 등 특정한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국가들이 개인식별번호를 부여하고 있다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생각하기
거의 전 국민의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세상이 됐다. 기존의 주민등록번호를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워진 상황이 된 것이다. 문제는 어떤 개선책을 마련할 것이냐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생각건대 주민등록번호라는 이름이 됐든, 어떤 이름이 됐든 국민을 식별할 수 있는 번호를 모두 없애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얘기다. 남성이라면 누구나 국방의 의무가 있는 징병제를 실시하는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꼭 국방의무가 아니더라도 각종 복지 수요가 계속 늘어가는 상황에서 국민을 식별할 수 있는 번호의 필요성은 오히려 점점 더 높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감정적 접근보다는 좀 더 현실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우선 현재 번호는 이미 대부분 노출된 만큼 새로운 번호를 부여하는 것은 꼭 필요해 보인다. 다만 이 번호는 주기적으로 다시 바꾸는 등 보완조치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 이와 함께 온갖 온·오프라인 생활에서 무분별하게 주민등록번호를 수집하고 있는 관행을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이 부분에 대한 사후관리가 주민번호를 바꾸는 것보다도 더욱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김선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k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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